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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 경제학이 나아갈 길

내친김에… 앞서 글과 같은 매체에 실렸던 글 하나 더. 2009년 8월에 썼다. 아래 글에서 묘사된 <이코노미스트> 지상의 논쟁이 문득 떠오른다. 상당히 치열했고, 그런 점에서 우리가 본받을 만한 것이었다.

글의 말미에 ‘국가의 역할’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적어도 이때만 해도 여러 논쟁들 중에서 국가의 역할과 위상이 과감하게 인정되는 분위기였는데, 최근들어 많이 바뀌고 있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2008년 9월 이후 엄청난 액수의 돈(물론 그 돈은 모두 국민의 세금에서 조달되는 것으로 보면 된다)이 망가진 금융시스템의 구출에 쓰였고, 또 이를 위한 ‘정당성’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금융시스템은 국가의 일부다'(당시 영국 총리였던 고든 브라운의 말)라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보라. 이를테면 최근 우리나라에 와서 논쟁을 벌이기도 했던 크루그만(Paul Krugman)과 나이올 퍼거슨(Niall Ferguson)을 보라. 크루그만이 대체로 케인스주의에 입각해서 국가의 역할을 과감히 인정하고 있는 반면, 퍼거슨은 (속류) 고전파적인 입장–이는 곧 케인스의 정의에 따른 고전파를 의미한다–에서 거의 ‘야경국가론’에 다름 아닌 논조를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크루그만과 퍼거슨의 논쟁은 2008년 4월부터 시작되었는데, 논쟁 초기엔 퍼거슨도 국가의 역할에 심각하게 의문을 달지는 않았었다. 그의 입장은 시간이 가면서 묘하게 바뀌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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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이 나아갈 길

1. 최근 <이코노미스트>가 현재의 범지구적 경제위기와 관련, 경제학을 본격적으로 문제삼고 나섰다. 이 주간지는 7월 18일자에서 “경제거품 중에서 경제학의 명성에 낀 거품만큼 장관을 연출하며 터진 것도 없을 것이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일련의 논쟁적인 기사들을 무려 6면 이상에 걸쳐 냈다.

흔히 경제학자를 “세속의(worldly) 철학자”라고 하는데, 이를 비꼰 게 분명한 “다른 세상의(other-worldly) 철학자들”이라는 한 기사의 제목이 보여주듯, 이번 비판은 경제학의 비현실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재밌는 것은 이 기사들이 경제학자들을 “수학적 모형화”와 “효율시장가설”의 맹신자로 묘사하면서, 그런 경향에 반대하는 크루그만(Paul Krugman)이나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 같은 또 다른 경제학자들의 견해에 크게 기대고 있다는 점이다.

이 기사들은 곧바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이 잡지는 3주 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루카스(Robert Lucas) 시카고대 교수의 반론기사를 이례적으로 한 면 가득 내보내기에 이르렀다. 동시에 같은 호의 “독자편지”란은 3주 전의 기사들과 관련된 의견들로만 채워졌다.

2. 현대경제학의 발상지답다고 해야 할까? 꼭 <이코노미스트>가 아니라도, 영국 종이매체엔 경제학의 잘못을 꾸짖는 기사들이 연일 끊이지 않고 있다. 이때 매체들은 단순히 여러 의견들의 전달자에 그치는 게 아니라 각기 꽤 명확한 “입장”을 가지고 다양한 의견기사들을 통해 적극적으로 논의를 이끌고 있다. 특히 문제의 성격상 가장 활발하게 논쟁에 참여하면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코노미스트> 같은 경제지의 경우, 그 입장의 “배경”도 커다란 흥밋거리다.

<이코노미스트>는 자유무역 옹호, 보호주의 반대라는 기치를 내걸고 1843년에 창간됐다. 그 시작부터 “정치적”이었던 셈인데, 그 당시엔 대기근을 겪던 아일랜드에 식량원조를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정도로 자유방임 원칙에 충실했다. 1980년대엔 현재 신자유주의라 불리는 경제・정책이념의 화신인 레이건과 샛처 정부에 호의적이었다.

이와 같은 과거 행적을 놓고 볼 때, 앞서 소개한 <이코노미스트>의 경제학 비판은 언뜻 보면 그 기존입장에 배치되는 것 같다. 과연 이 잡지가 한때 자신이 옹호하던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비판하고, 케인스주의자이자 오바마 지지자이며 “복지국가의 수호자”를 자임하는 크루그만 같은 인물에 의존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좀 더 폭넓게 말하면, 현재 세계적으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는 전국민의료보험체계의 필요성을 대체로 인정하고 영국 국내정치에서는 보수당보다 노동당에 호의적인 모습을 종종 보이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러나 이런 입장은 2009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보수당 지지 쪽으로 급선회한다. 그리고 이런 입장변화를 주도한 것이 ‘황색언론’의 대명사 <더 선>(The Sun)이었다는 사실은, 그 입장 변화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것 같아 매우 흥미롭다.]

3. 그 해답은 궁극적으로는 20세기 말에 닥친 이데올로기의 혼란과 재편에서 찾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현실사회주의 붕괴는 기존의 좌파에 치명적인 타격을 날렸지만, 동시에 이 잡지가 떠받드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이념적·실천적 공간을 넓혀놓았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번 경제위기를 전후해 제기된 이슈들, 즉 몇몇 거대기업들의 국유화나 중앙은행의 역할, 경제학의 향후 재편방향 등을 둘러싸고 <이코노미스트>나 <파이낸셜 타임스>―소유구조로 보면 이 둘은 거의 하나나 다름없다―가 내놓는 의견이 전통적으로 노동당 성향인 <가디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는 것은,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조금 오래된 우스갯소리를 하나 하자면, 한 번은 <이코노미스트>가 당시 이탈리아 총리후보였던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를 무자격자라고 비판했다가 그로부터 “이코뮤니스트”(Ecommunist)라는 무시무시한(!) 별칭을 얻기도 했다.

4. 이런 사정을 두루 생각하면, 현재 <이코노미스트>가 제기하는 종류의 것이 경제학 자체에 대한 내재적이고 심도 있는 비판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하지만 학문이란 것도 결국엔 현실의 반영이고 그 다양한 이해관계들의 대립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니, 이는 한편 당연한 듯도 싶다.

그렇다면 역설적이게도, 경제학이 비현실적이라는 데서 출발했지만 결국 그것은 “세속의” 학문임을 보였다는 게 <이코노미스트>의 경제학 비판의 미덕이라고 해도 될까? 나아가 그것이 경제운영에서 국가의 역할을 크게 인정하고 있는 것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분위기를 계속해서 끌고가지 못한 것은 좌파들이 크게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끝)

[기사] Stiglitz on Keynes

Stiglitz, J., 2010. The Non-Existent Hand. Review of Keynes: The Return of the Master by Skidelsky, R. London Review of Books [Online] vol. 32 no. 8 pp. 17-18. Available from http://www.lrb.co.uk/v32/n08/joseph-stiglitz/the-non-existent-hand [Accessed 19 April 2010].


스티글리츠는 흔히 “정보경제학”의 대가로 알려져 있고 (내 기억엔) 그가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것도 그에 대한 기여 덕분이었다. 그러나 요즘 같은 전세계적인 경제대란 속에서, 그리고 특히 그에 대한 처방을 논하는 자리에서, 그는 종종 “케인스주의자”로 여겨지곤 한다.

위에서 링크한 글은 최근에 한국에도 번역된 케인스 전기의 저자인(스티글리츠가 표현하듯이 “Keynes’s great biographer”인) Robert Skidelsky 경의 최근작 《Keynes: The Return of the Master》(2009)에 대한 스티글리츠의 서평이다. 여기서 그는 (스키델스키의 손을 거친) 케인스에 대해 코멘트하면서, 그와 자신 사이의 차이점을 부각시킨다.

The present crisis should lay to rest any belief in ‘rational’ markets. The irrationalities evident in mortgage markets, in securitisation, in derivatives and in banking are mind-boggling [. . .] If we are to design policies to prevent crises or to deal with them when they occur, it is essential to understand the critical flaws in the standard paradigm. It is here that Skidelsky goes astray.

오늘날 케인스주의자로 자의든 타의든 규정되는 사람들에는 여러 부류가 있다. 그 중 스키델스키는 “케인스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말하자면 ‘강경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 리뷰되고 있는 책에서 그는 (스티글리츠는 언급하지 않지만) 심지어 (케인스가 창안했다고 할 수도 있는) 거시경제학이 (‘미시적 기반micro-foundation’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지고 있는 현상을 보면서, 거시경제에 대한 진정한 안목을 기르기 위해 “거시경제학자에겐 미시경제학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매우 과감한 주장까지 내놓기도 했다.

이에 대해 스티글리츠는 현재의 공황에는 금융적인 측면이 많이 개입되어 있으며 케인스의 기본 문제의식은 실업(과 유효수요)에 있었으므로, 오늘날 문제가 되는 금융시장의 운영이나 규제에 대해선 별로 할 말이 없다고 반박한다. 대신 그는 케인스 이후 여러 케인스주의자들에 의해 여러 유용한 시각들이 발달했음을 상기시키는데, 그럼으로써 그는 스키델스키가 그런 성과에 정당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다시 케인스로!”라는 급진적인 모토를 내세운다고 비판하는 셈이다.

그러나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티글리츠는 케인스 및 케인스주의가 이룬 업적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임은 물론이다.

Keynes’s great contribution was to save capitalism from the capitalists: if they had had their way, they would have imposed policies that weakened the economy and undermined political support for capitalism. The regulations and reform adopted in the aftermath of the Great Depression worked. Capitalism took on a more human face, and market economies became more stable. But these lessons were forgotten. Thatcher and Reagan ushered in a new era of deregulation, growing inequality and weakening social protection. We are now seeing the consequences, and not just in greater instability. Keynes’s insights are needed now if we’re to save capitalism once again from the capitalists.

위에서도 드러나듯이, 스티글리츠가 힘줘 강조하는 것은, 케인스의 통찰을 이어받아 케인스 이후에 많은 이론적 진전들이 있었다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가 이어받고 복원해야 할 것은 케인스뿐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이런 과정을 거쳐 경제학을 재편한다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경제 및 시장이란 불완전하고 비효율적인 요소들을 늘 품고 있다”라는, 주로 케인스 이후에 지각되고 발전된 사고에 기반해서 이뤄져야 한다고 은밀히 (또는 노골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특히 이와 같은 재편은, 스티글리츠를 대표로 하는 이른바 ‘post-Washington consensus’론자들에 의해 특수한 방향으로 실현되고 있다. 물론 여기에 대한 좀 더 급진적인 비판도 존재한다. 그런 비판을 내세우는 대표적인 논자인 Ben Fine의 글 중 하나(〈지구화와 발전 개념의 비판적 검토: 정치경제학의 역할은 무엇인가?〉)가 국내에도 번역/소개된 바 있으며, 이런 비판은 ‘정치경제학 진흥을 위한 국제 발의(IIPPE)‘라는 이름으로 좀 더 지속적이고 조직적으로 전개되고 있기도 하다. IIPPE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의 다른 글도 참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