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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고용 없는 성장, 우리는 고용 있는 성장?

앞에서 heesang님께서 재미있는 글을 써주셨다. 거기에 좀 더 이어서 몇 가지 얘기를 늘어놓으려고 한다.

몇 년 전 미국에서 ‘고용 없는 성장(jobless growth)’이라는 표현이 등장했고, 우리나라도 특히 2009년 후반에서 2010년, 그러니까 2007/08년 위기로 급강하를 겪은 뒤 찾아온 상대적인 반등기에 그런 유형의 성장세를 경험한 바 있다.

그런데 요즘 지표를 보면, 결코 고용이 없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다. 특히 올들어서는 취업자수의 증가세가 가속화돼 상반기 중 취업자 수는 전년동기 대비 약45만 명 가량 늘어난 것으로 관찰된다. 이것은 그 자체로 매우 고무적인 현상임에 틀림없고, 정부 당국자로서도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이다. 미국의 ‘고용 없는 성장’과 비교한다면 더더욱 말이다.

하지만 heesang님이 지적하신 대로, 최근 미국의 고용시장도 조금씩 풀리고 있는 모양새다. 이번에 연준이 단행한 제3차 양적완화, 즉 이른바 ‘QE3’의 궁극적인 목적도 실업률을 6% 대까지 낮추는 것이라고 하니, 좀 더 지켜볼 일이다.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와보자. 취업자 수가 증가한 것 자체는 사실이지만, 우리는 그 내용을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아마도 “올들어 취업자 수가 작년에 비해 45만 명 정도 늘었어”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은 의아해 할 것이다. 대체 이 많은 청년백수들, 한낮에 도심의 커피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저 선남선녀들은 다 뭐냐고!

그렇다. 안타깝게도, 아니, 잔인하게도, 늘어났다는 45만 명의 취업자는 거의 대부분 50대 이상의 고령층에 속한다. 다음 그림을 보면 잘 드러나듯이, 50대 이상의 연령대에서 취업자가 늘어나 전체적으로 ‘고용 대박’의 신화를 창조하고 있는 동안, 20대에서는 취업자 수가 오히려 줄고 있다.

[이 그림에서 각 그래프 위의 점들은 전년 같은 시기에 비해 취업자 수가 얼마나 늘었는지를 보여준다는 데 유의해야 함. 그러니 곡선이 떨어진다고 취업자가 줄어드는 게 아님.]

취업자 수 증가가 극에 달한 올해 2/4분기의 경우, 50대와 60대 이상 연령층에서 늘어난 취업자 수는 모두 50만이 넘는다. 이는 곧 (전체 취업자 수 증가분이 50만보다 적으므로) 다른 연령대(20~40대)에서는 취업자 수가 줄었음을 의미한다.

사실 이상과 같은 현상은 어느정도까지는 자연스럽다. 인구구조 변화 때문이다. 즉 오늘날 한국의 인구피라미드에서 가장 두터운 층을 형성하고 있는 베이비붐 세대(1950년대 중반~60년대 중후반에 태어난 세대)가 점차 나이가 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인구효과(population effect)를 고려하더라도, 취업자수의 증가분의 대부분이 고령층에서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은 뒤집어지지 않는다(50대 이상에서 취업, 늘어도 너~~무 늘었어).

그렇다면, 50대 이상의 분들은 어떤 식으로 고용되고 있는 것일까? 설마 그들이 모두 취업원서를 들고 신규취업을 하진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 이전부터 고용되어 있다가 나이가 들어 자연스럽게 ’50대 취업자’가 된 분들이 대다수일 것이며, 통계상으로 이들은 ’50대 취업자 증가분’의 일부를 구성한다. 실제로 통계를 들여다봐도 ‘상용근로자’가 가장 많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다. 바로…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자영업자’가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잘 다니던 회사에서 조기퇴직해서 동네에 쥐구멍만한 편의점을 내고, 거기에 자신의 여생을 걸고 있는 김사장님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그나마 나은 처지임을 덧붙여야겠다. 이것이 이른바 ‘고용의 질적 저하’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물론 위와 같은 사장님들이 동네에 편의점을 낸 것을 그들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라고 보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 그들은 왜 편의점을 낼 수밖에 없었을까? 말할 것도 없이, 회사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다시 위 그림을 보면… 2007년 하반기부터 취업자 증가가 50대에서조차 둔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이것이 음으로 떨어지지 않는 이상 취업자 수는 늘고 있는 것임). 더 설명이 필요한가?

자.. 이제 이상의 ‘썰’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몇 개의 교훈적인(!) 명제들을 간단히 정리해보자.

1. 가장 먼저, 최근 고용지표의 개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고용은 계속해서 악화되고 있다. 그러니까 “최근의 고용상황 개선은 고용상황 악화가 드러나는 정반대의 표현형식이다”라고 누군가를 흉내내 멋들어지게 말할 수 있다. 또는, 최근의 고용상황 개선은 21세기 초의 경제위기로부터 우리가 회복되고 있다는 신호탄이 아니라 바로 그 경제위기의 모순된 표현이다.

2. 어떤 이들은 위 그래프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두고, “50대가 20대를 착취하고 있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제는 거론하기도 짜증나는 {88만원 세대}의 저자들이 그 중 하나인데, 이때 이들이 ‘착취’라는 말을 매우 비과학적으로 쓰고 있다는 데 유의해야 한다. 즉 그들이 의미하는 것은, 50대 때문에 20대가 취업을 못하므로 결과적으로 전자가 후자를 착취한다는 것인데… 우리는 이럴 때 ‘착취’라는 말을 써서는 안 된다. ‘착취’는 공장 같은 데서 직접적으로 하는 거다.

3. 그러나 이상의 내용으로부터, 바로 그러한 착취가 실제로 50대와 20대 사이에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우리는 떠올릴 수 있다.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세대 간 착취’와는 다른, 진정한 의미에서의 착취 말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등장한 그 쥐구멍 만한 편의점을 가진 사장님은, 속알딱지마저도 쥐구멍만해져서 20대 알바녀석을 못 잡아먹어 늘 안달이기 때문이다. 좀 더 드라마틱하게 말한다면, 여기서 우리는, 50대 자영업자의 증가와 20대의 불안정 고용 사이의 구조적 연결고리를 확인할 수 있다.

4. 알바녀석의 피를 쭈~욱쭉 빨어먹음에도 불구하고, 위 사장님의 말년이 그리 편안하진 않으리라는 것 또한 우리는 잘 안다. 왜냐. 그는 곧 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구멍가게 다 날려먹고 거기 투자한 돈도 홀라당 까먹고… ㅠㅠ 물론 그러는 사이에 자본은, 각종 이자와 수수료는 우리의 사장님으로부터 꼬박꼬박 챙겨갈 것이다.

 

[자캠 강좌] 정치경제학의 방법론

이번에 자유인문캠프에서 2개의 강의를 한다. 하나는 나 혼자 하는 거고(자본론 읽기. 기본적으로 지난 겨울에 했던 것과 거의 같지만, 좀 더 시간안배 등에 힘써서 3장까지 끝낼 거다!!), 다른 하나는 다른 선생님들이랑 팀으로 한다(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의 주제들). 그런데 두 번째 강의는, 수강생이 별로 없어서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르므로(아직 결정되지 않은듯), 강의시작이 3일 앞으로 다가온만큼, 일단 간단한 강의계획을 올려본다.

*                         *                         *

[. . .] 제가 이번에 다루고자 하는 것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경제를 다루는 기본적인 방법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는 대상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통해) 흔히 범해지고 있는 잘못된 이해를 “비판”하고 “교정”하는 것까지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두 번의 강의에서 다루기엔 다소 무리가 있을 수도 있겠는데요, 아쉬운 대로 다음과 같이 구성을 해봤습니다.

1. 첫 번째 강의(7월 25일 수요일 오후 7~10시)

흔히 마르크스의 “방법”이라고 하면, 그의 “변증법적 서술 방법”을 가리킵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이와 같은 일반적인 인식이 과연 올바른가를 살펴볼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과연 변증법이란 마르크스에게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해볼 것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저는, 초기에서부터 자본론 또는 그 이후의 저작들 속에서 “변증법” 및 “방법”이라는 것을 마르크스가 어떻게 대해왔는지를 추적해볼 것입니다.

2. 두 번째 강의(7월 27일 금요일 오후 7~10시)

이번 강의는 앞서 강의와는 어느 정도 별개로 꾸며질 것인 한편, 자본론과 좀 더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주제를 다룰 것입니다. 다름 아닌 자본론이 탐구대상으로 삼는 근대 자본주의 경제의 특징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제에서, 우리가 “가치”라고 부르는 것이 형성될 수 있는 역사적 조건들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을 좀 멋지게(?) 만들면, “왜 마르크스는 이 대상을 다루기 위해, 앞서 강의에서 살펴봤던 것과 같은 방법을 필요로 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고 나면, “투하노동 vs 가치형태”와 같은 전통적인 주제는 물론, “물질노동 vs 비물질/인지노동”과 같은 보다 최근의 주제에 대해서도 일정한 견해를 가지실 수 있으리라 봅니다.

저의 강의에 이어, 류동민 선생님께서 가치이론에서 가장 논쟁적인 주제인 전형문제를 다뤄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엔 유철규 선생님의 금융에 대한 강의가 있습니다. 두 분 모두 각각의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로서, 특히 각 주제들을 현대적인 맥락에 맞게 풀어내어 주실 거라 기대됩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호응 바랍니다! (끝)

[201203]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이해 비판 (2)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9권 제1호(2012년 봄)에, 나의 논문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이해 비판: ‘비물질노동’의 개념화와 측정을 중심으로”가 실렸었다. 앞서 밝혔듯, 이번에 토론회를 준비하면서 이 논문을 간단하게 요약했는데, 다음과 같다(한글초록 및 기타 추가적 정보는 여기를 참조하시길).

[※ 추가(2014년 2월 12일): 원하는 분이 있어서… 전문링크]

먼저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인지자본주의론의 현재
2. 소극적 비판: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인식에 대하여
_(1)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비판의 개요
_(2) 인지자본주의론이 보는 가치이론: 모호하거나 단순하거나
3. 적극적 비판: ‘비물질노동’을 가치이론적으로 다루기 위한 메모
_(1) ‘비물질성’, 노동의 특정 유형의 성격인가 노동 자체의 성격인가
_(2) 단순 비교 대 역사적 형성
_(3) 가치이론의 기반: 측정가능성 대 비교/동등화
4. 맺음말

보시다시피 이 글에서 핵심은 2절과 3절이다. 따라서 아래 요약은 이 두 절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1절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언뜻 보면 1절은 그냥 구색 맞추기 위해 들어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부분을 읽은 독자들은 아마도 조정환이 어떤 종류의 연구자인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왜냐?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자신이 마치 ‘인지자본주의’에 대한 기존의 논의를 집대성하고 나아가 그것을 한걸음 더 진전시키고 있다는 듯이 묘사하지만, 실상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제껏 관련 논의를 국내에 소개해온 선구자들을 단한번도 언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이건 적어도 ‘예의’의 문제다), 관련된 세계적 논의들을 충분히 검토하지도 않았다(이건 적어도 ‘성실성’의 문제다). 이러한 행태로부터 드러나는 조정환의 ‘의지’는 무엇인가? 자신을 인지자본주의론의 대표주자로 내세움으로써 자신이 가진 기존의 지적 권력을 유지하려는 추악한 의지, 자신의 책을 팔아줄 독자들을 잃을지 모른다는 가련한 두려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로써 나는, 조정환이 어떤 글에서 전희상에 대해 했던 부당하고 모욕적인 표현을 그에게 되돌려준다. 더구나 특히 이 후자의 경우엔, 조정환이 그리도 혐오하는, ‘경제적’ 내지는 ‘가치이론적’ 고려(!)가 개입되었으리라(자, 이렇게 경제학 또는 가치이론은 여러분들의 실생활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부디 두려워 말길). 따라서 나의 비판은, 조정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조정환이 아주 작은 일부로서 포함되어 있는 ‘인지자본주의론’ 일반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조정환은 (당연한 얘기겠지만) 인지자본주의론의 전부도 아니고 대표주자도 아니다. 그렇다고 그가 한국의 (현실적 또는 이론적) 특수성을 상당히 반영한 논의를 내놓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나는 오히려 그가 인지자본주의론을 어떤 면에선 왜곡시키는 것 같기도 하다. 따라서 그가 인지자본주의론과 관련해서 특별히 주목받을 필요는 없다. 이건 그러니까… 김수행 교수가 공황론을 주로 소개했다고 해서 김교수의 입장이 공황론의 전부는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당연하지 않은가? 실제로 과거엔 김교수가 공황론의 대표자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별로 없었던 듯하다. 내가 알기론 김교수 자신도 그렇게 자신을 내세운 적은 없다. 그런데 요샌 조정환이 인지자본주의론의 대표주자인 것처럼 이야기되고 있다. 사람들이 그만큼 게을러졌거나, 조정환의 간이 배밖으로 나왔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제 본격적인 비판을 보자. 애초 나의 주장은 두 부분으로 나눠어 있었지만, 다음에서는 이 둘을 뭉뚱그려 모두 네 개의 주장으로 요약했다.

1. 가치이론에 대한 지나친 단순화/오해. 이것은 마치 {자본론} 제1권 제1장을 읽으면서, “터무니없이 높은 명품가격”을 반박근거로 내놓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즉 여기서 상품가치는 매우 단순하게도 “그 상품을 만드는 데 드는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으로 규정되는데, 이른바 명품의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은 이런 원칙을 거스르는 것 같기 때문. 이에 대해 가장 적절한 반응은, “제3권까지 한번 가봐라”라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자본론}에서 제시된 이론은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고 특히 가장 단순하고 추상적인 최소한의 규정에서 출발해서 점차 복잡하고 구체적인 영역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말해 가치와 가격의 괴리 문제는 계속해서 구체적 규정들이 덧붙여짐에 따라 점진적으로 고려된다는 것이다.

결국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기각은 마르크스의 가치개념/규정을 제1권 제1장 수준, 즉 매우 단순하고 추상적인 차원에서 파악한 채로 이뤄진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이 기각의 근거로 삼는 현상들은 상당히 구체적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부당할 뿐만 아니라, 그런 논리를 받아들이더라도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은 그렇다면 가치이론의 기각이 왜 포드주의 시대(=노동과 자본 간의 “협약”에 기초해 종전보다 현저히 높은 임금수준이 실현된 시대)에 일어나지 않고 지금 일어난다는 것인지 대답해야 할 것이다.

2. 비물질성의 지위. 인지자본주의론에서는 비물질노동을 노동의 새로운 유형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비물질성은 노동의 일반적인 특성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다만 이제까지 가치이론에서는 그런 성격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을 뿐이다. 앞서 밝혔듯 가치이론은 단순/추상에서 복잡/구체로 나아가는 열린 구조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비물질성 문제도 논의의 어떤 단계들에서 차차 고려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항에 주의를 기울일 계기를 줬다는 점에서 인지자본주의라는 문제설정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3. 그렇다면 노동의 비물질성, 나아가 그러한 비물질성이 특히 두드러져 보이는 노동유형들을 가치이론적으로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당연히 제기될 것. 인지자본주의론에서는 예컨대 과학기술종사자나 간병인의 노동과 전통적으로 상정되는 이미지를 가진 노동, 이를테면 볼트와 너트를 맞춰 조이는 기계공의 노동을 대비시키면서, 오늘날 자본주의에서는 전자가 두드러진다고 주장함(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그러나 이런 식의 단순 병치/비교는 마르크스의 방법과 배치된다. 즉 특정 노동들의 병치/비교보다는 “역사적 형성”을 보는 것이 더 유의미한 파악법이다. 과학기술종사자나 간병인을 기계공과 대비시키면 누구라도 그 “인지적 아우라”에 취하기 쉽겠지만, 역사적 형성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의 과학기술종사자나 간병인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기계공의 모습에 가깝다(즉 자본에 고용되어 있다는 것). 이로부터 제기되는 이론적 문제는, 특히 현대자본주의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과학기술노동의 그와 같은 역사적 형성—즉 자본주의화—이 현대자본주의의 재생산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는 것이지, 그것을 근거로 기존 이론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다.

4. 마지막으로, 어쩌면 가장 핵심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측정” 자체에 대해. 인지자본주의론은 오늘날 노동을 둘러싼 여러 환경의 변화 때문에 상품의 생산에 드는 사회적평균노동시간을 측정하는 게 불가능함을 근거로 가치이론의 기반이 사라졌다고 본다. 두 측면에서 반론이 가능하다.

(1) 마르크스 자신도 오늘날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이 제기하는 측정의 어려움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노동일’을 다루는 {자본론} 제8장(불어/영어판 제10장)을 보면, 정해진 노동시간을 야금야금 늘리려는 자본가들의 작태들이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이를 마르크스는 “분 뜯어내기”라고 부른다. 물론 이런 작태들은 한 상품에 들어간 노동시간이 얼마인지를 애매모호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를 자신이 방금 전에(=즉 제1장에서) 내놓은 “직접노동시간에 의한 가치규정” 명제를 철회하는 근거로 삼지 않았는데, 이는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이 상상하듯 그러한 행태들이 마르크스 시대엔 별로 두드러지지 않아서가 아니라(실제로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었다는 게 “노동일” 장에서 마르크스의 요지다), 자신의 가치이론의 체계상(마르크스의 가치이론의 ‘개방성’을 떠올릴 것!) 그것은 고려되더라도 뒤에 가서야 고려될 문제이기 때문이다. 실제 현실에서는 “초과착취”가 매우 일반적으로 이뤄지고 있지만, {자본론} 제1권(부터 제3권까지)에서는 “정상착취”만 전제되는 것과 같은 이치.

(2) 측정 자체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역사적, 정치적, 특히 기술적 사정과 복잡하게 얽혀있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시간에 대한 관념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노동일”이라는 표현 하나만 봐도 금새 드러난다. 마르크스는 이를 “하루 동안의 노동시간”이라는 의미로 쓰지만, 원래 노동일(working day)이란 노동하는 날, 그러니까 “휴일”의 반대말이었다(참조). 즉 노동의 단위가 “하루”였던 시대로부터 “시간”으로 바뀌어가는 사정을 “노동일”이라는 애매한 표현은 반영하는 것인데, 물론 이러한 변화가 기술적 뒷받침 없이 진행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즉 “노동일”이 아니라 “노동시간”이라는 개념이 유의미하려면 실제로 그것을 측정할 수 있어야 하며, 이는 손목시계의 광범위한 생산을 전제한다(물론 “(자동장치로서의) 시계”의 출현의 의의는 단순히 노동시간의 측정 이상이지만). 이렇게 보면, 오늘날의 “노동시간”이 19세기의 시계, 또는 시간관념으로는 측정이 불가능할지 몰라도, 오늘날의 정밀화된 시계, 시간관념으로는 측정 가능하고, 또 끊임없이 측정되고 있다.

다른 한편, 인지자본주의론은 직접적인 노동시간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교류작용들도 오늘날엔 상품가치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 또한 측정 불가능성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다. 물론 오늘날 예컨대 블로그를 통한 광고가 상품가치 형성에 커다란 기여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은 언제나 있어 왔다. 마르크스가 그것을 몰랐을까? 그가 살았던 중기 빅토리아 시대는 그야말로 “유행과 평판의 시대”였다. 그런데도 그가 그런 측면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기본적으로 그의 이론의 미완결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상품의 평판을 측정할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구글 애드센스의 등장은,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오늘날엔 상품가치 형성에 평판이 주되게 참여한다는 뜻으로 읽기보다는, 드디어 “평판”이라는 것을 측정할 수 있는 수단이 등장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비로소, 말하자면 “평판의 정치경제학”을 본격적으로 제기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사실은 “측정”이 갖는 이러한 가변적인 성격 때문에 De Angelis and Harvie는 “측정이란 정치적 범주”라고 말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측정 문제의 본질은, 그것의 기술적 가능성이 아니라 상이한 노동들이 끊임없이 비교되고 또 그럼으로써 동등화된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그리고 이 후자는, 사실 아담 스미스나 헤겔, 마르크스가 공통적으로 주목했던 근대사회의 구성원리이기도 하다.

5. 맺음말. 나의 글이 인지자본주의론에 대한 포괄적인 비판은 아니다. 그러나 인지자본주의론이 기존의 가치이론에 대한 비판, 특히 노동시간의 ‘측정 불가능성’을 주요 근거 중 하나로 해서 세워져있는 만큼, 이상의 비판이 인지자본주의론에 일정한 타격은 가하리라 본다.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가치이론적으로 좀 더 유의미한 방식으로 인지자본주의론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개입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끝)

[※ 추가(2014년 2월 12일): 원하는 분이 있어서… 전문링크]

[후기/토론회] 인지자본주의에서 ‘가치’와 ‘주체’의 문제

계간지 {문화/과학}에서 주최하는, “제1회 문화과학 ‘북 클럽’ 논쟁: 인지자본주의에서 ‘가치’와 ‘주체’의 문제”라는 제목의 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여했다. 토론자는 나와 조정환 선생, 심광현 선생, 이렇게 셋이었다. (웹자보)

그러니까 애초 기획은, 조정환의 책 {인지자본주의}에 대해 나와 심광현이 ‘가치’와 ‘주체’라는 두 측면에 각각 주목해서 토론을 펼치는 것이었고, 내가 이해하기로는 그 책을 대상으로 두 명의 토론자가 주로 ‘공격’을 하고 저자인 조정환이 ‘방어’를 하는 형식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결과는? 일단, 심광현 선생께서 개인적인 사정으로 토론회에 못 나오시는 ‘사고’가 났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나와 조정환, 이렇게 양자구도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 전체적인 느낌은 그곳이 ‘토론회장’이었다기보다는 조정환의 ‘정견발표장’ 같다는 거였다. 물론 그렇게 된 데는, 토론자인 내 책임도 일정하게 있었음을 부인하진 않겠다.

다음은 나의 간단한 후기다. (물론, 매우 주관적일 수 있는 후기이며, 다른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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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무슨 토론회 자리(아마도 ‘맑스 꼬뮤날레’였던 것 같다)에서 한번인가 본 것 빼고는 조정환 선생이 말하는 것을 직접 본 적이 없다. 그만큼 그에겐 관심도 별로 없었고, 내가 그에 대해 가진거라곤 몇몇 이미지뿐이었다. 그 이미지, 그러니까 조정환 하면 평소에 떠오르던 이미지는 이런 거였다. 뻔뻔스러움, 무지, 무시, 열등감, 그리고—이게 백미인데—이상의 모든 악덕들을 커버해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 어떤 ‘영성적’ 아우라. (특히 이 마지막 것은 토론회에 왔던 누군가도 얘기했던 것이기도.)

이번 토론회를 거치면서 나는 위 이미지들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내겐, 이번 이벤트가 (지루하긴 했지만) 무엇보다 ‘lots of fun’이었다. 하지만 그는 실질적으로 나의 문제제기에 단 하나의 제대로 된 답변도 내놓질 않고, 이리저리 피해다니길 일삼았을 뿐이다. 아니, 그는 자신의 답변을, 지금 자신이 집필중이라는 책에서 길게 내놓을 것이라는, 상당히 ‘민망한’ 책광고로 대신했을 뿐이다. 물론 나는 이 답변을 그다지 읽어볼 필요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이번 토론 덕분에 더더욱.

하여튼 이번 이벤트는 결코 ‘논쟁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게 조정환 선생의 잘못이라 생각하진 않는다(그는 그냥 ‘그’였을 따름이다). 다름아닌 행사를 주최한 {문화/과학}쪽의 문제였다. 그들은 그 자리를 ‘토론회’로 만드는 데 완전히 실패했고, 특히 내겐 엉뚱한 질문을 내놓기도 했다(도대체 조정환이 말하는 ‘명령(가치)’가 뭐냐는 설명을 왜 나한테 요구하냐고! 저도 사실은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엉엉). 그들은 조정환 선생의 지루하기 그지없는 하나마나한 발언을 전혀 제지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5시에 마치기로 예정되었던 토론회는 토론자 중 한 명이 빠진 데다가 ‘토론자들 간의 토론’이 거의 없었는데도 무려 6시 반이 되어서야 끝이났다. 덕분에 난 오줌보 터지는 줄 알았고. ㅎㅎ 그밖에 개인적으로 상당히 기분나쁜 일이 있었는데, 당시엔 바쁜일이 있어 그냥 나왔지만 이에 대해선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할 예정이다.

청중은 어땠는가? 사실 이번 토론회에 나선 유일한 이유는 바로 청중 때문이었다. 즉 그 자리에 직접 와주신 좁은 의미의 청중은 물론이고, 나중에 다른 어떤 형태로 그 토론회를 간접경험할 넓은 의미의 청중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러나 플로어에서 나오는 질문들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 질문들을 내놓은 이들이 ‘가치’보다는 ‘주체’에 더 관심이 많았다는 것은 전혀 문젯거리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들이 ‘가치’에 대해, 좀 더 일반적으로는 ‘경제’나 ‘경제학’에 대해 매우 단순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그에 대해 전혀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는 것이다(예컨대, 조정환은 현재의 부동산거품을 ‘인지적 요소’에 따른 고평가라고 불렀다ㅋ). 이건 그러니까, ‘나는 경제(학)에 대해 관심이 없다’라는 정도가 아니라(이건 괜찮다), ‘경제(학)이란 게 결국 이렇지 않냐’라는, 경제학에 대한, 그리고 현재 전개되고 있는 세계경제/한국경제의 상태에 대한 매우 ‘강력한 판단’이었던 거다. 결국 마무리 발언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제학을 공부하는 저로서는, 몇 안 되는 여러분들 앞에서조차 철학이니 정치니 하는, 제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발언하는 게 정말 부담스러운데, 여러분들은 경제에 대해 너무도 쉽게 이야기하시는군요.” 물론 모든 청중이 다 이랬다는 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랬다.

끝으로, 조정환이 내 질문에 답변을 아주 안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은 밝혀야겠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는 두 가지 답변을 했다. 답변의 적절성에 대해선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서 판단해주시리라 믿는다.

(1)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은 마르크스의 가치이론이 갖는 복합적인 성격, 복잡한 구조를 오해하고, ‘가치’의 문제를 모조리 {자본론} 제1권 제1장의 수준에서 이해하고 부당하게 기각한다는 내 질문에 대해: “나 {자본론} 열심히 읽었다. 옛날에 도망다니면서 얼마나 열심히 읽었나 모른다. 아마 내가 웬만한 경제학자들보다 {자본론}에 대해 잘 알껄?”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왜 그러냐고요 ㅠㅠ 물론 이 얘길 그는 어려웠던 지난날의 감상에 젖어 매우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2) 인지자본주의론이 내놓는 인지/삶정치/비물질/정동 등의 노동들은, 처음엔 그저 고도로 복잡한 과학기술노동 정도를, 그러니까 ‘지식노동’을 의미했을 뿐이지만 점차 간병인, 가사도우미, 전화교환원 등도 포괄할 수 있도록 의미확장을 했다. 이와 같은 확장 자체가 상당히 심각한 이론적 무리수이기도 했지만, 그것을 통해 예컨대 ‘대졸/남성/20대 컴퓨터 프로그래머’와 ‘중졸/여성/50대 간병인’을 하나의 범주로 두는 것이 경제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가? 또한 정치적/주체적 차원에서 보더라도, 중요한 것은 이런 식으로 ‘간병인’을 (무슨 꼭두각시 내세우듯이) ‘이론적 주체’로 만드는 게 아니라 ‘현실적 주체’로 만드는 일이지 않은가? 라는 내 질문에 대해: “무슨 소리냐! 나는 결코 간병인이 프로그래머보다 못난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선 그렇게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는 분들이 더 훌륭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전형적인 논점흐리기! 졸지에 난, 근20년간 청소부, 가사도우미였던 내 어머니, 현재 간병인 일을 하시며 간밤에 환자들 똥오줌 치우는 내 가장 친한 친구의 어머니의 잠재력을 깔본 패악무도한 놈이 되었다ㅎㅎ)

이 정도면 코미디감도 못 된다. 요새 ‘개콘’, ‘코미디 빅리그’가 얼마나 재밌는데! (끝)

p.s. 내가 올초에 인지자본주의론에 대한 비판 논문을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냈기 때문에, 내가 이번 토론회에 불려나간 것이다. 이번 토론회 때문에 그 글을 간단히 정리해봤는데, 조만간 그걸 여기 올릴까 한다..

이론: 단순하고도 복잡한 것

이론이란 단순한 것이기도 하고 복잡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현실과의 관계에서 보면 단순할 수밖에 없다. 이론이란 현실에 대한 이론가의 지적 개입의 산물로, 거기에선 현실에 대한 일정한 추상화와 단순화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론의 추상성/단순성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며, 이론에 필연적으로 따라붙은 ‘원죄’와도 같은 것이다.

다른한편, 당분간 이론 그 자체의 영역이 있다고 해보자. 여기에서 이론은, 그러니까 ‘좋은’ 이론은 복잡해야만 한다. 즉 그것은 ‘진짜 현실’과 같은 복잡한 구조를, 그러나 ‘진짜 현실’과는 달리 (왜냐하면 이론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현실의 ‘지적 재구성’이므로) 체계적인 구조를 갖지 않을 수 없다. 마르크스가 {요강} 등에서 ‘현실/역사의 순서’와 ‘구조/논리의 순서’를 구별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이러한 복잡성을 갖지 못하는 이론은 필연적으로 ‘환원론’이 될 수밖에 없다. 즉 자신의 단순함 속으로 현실을 끌어들이려 하는 것이다. 반대로 복잡한 이론은 현실의 복잡성을 반영하면서 끊임없이 거기에 개입함으로써 끊임없이 발전한다. 그래서 단순하고 환원론적인 이론은 언제나 자신의 완결성을 주장하지만, 복잡하고 체계적인 이론은 언제나 자신의 부족함을 탓한다. 바로 이 부족함의 자기인식이야말로, 이론의 내적 발전을 추동하는 원동력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이라는 괴물 저작을 거의 완성해놓고도 그 출판을 미룬채, 그리고 죽음의 위협과 사투하면서까지도 자본주의의 작동과 변모에서 주의를 떼지 않은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통상적인 부르주아 이론(경제학을 포함해)이 전자와 같은 환원론인 반면, 마르크스의 이론은 바로 이런 후자에 속하는 이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이론에 대해 그것이 환원론(경제로의 환원론, 생산중심주의 등)이라고 비판하는 이들은, 이론의 위와 같은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사회, 공황, 경제학: 마르크스가 리카도에 가한 하나의 비판

오늘날까지도 경제학자들은 공황을 부정한다. 그들은 심지어, ‘공황’이라는 말 자체를 일부러 안 쓰려고 안간힘을 쓰기까지 했다. 이에 대해선 이 블로그에서 한번 지적한 바 있다(링크).

하지만 눈을 가린다고 어지러운 광경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말’을 없앤다고 그 말이 가리키는 ‘현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제학자들이 그러듯, 어떤 사태를 미봉적으로 부정하려 하면 할 수록 그 사태는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법이다. 그러다가 어떤 국면에 이르면, 누구도 그 사태를 부정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위기도 마찬가지다. 이에 대해 일전에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실제로 세계경제는 적어도 최근 40여 년만 놓고 봐도 끊임없이 공황에 시달려왔지만, 그때마다 이 공황들은 때로는 중동 산유국들의 자원이기주의의 탓으로, 때로는 중남미 포퓰리즘적 정부들의 방만한 재정운영이나 동(남)아시아 나라들의 유교적 잔재의 탓으로 얼버무려지곤 했다. 그러나 세계자본주의의 핵심부에서, 그것도 현대 경제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금융분야에서 불거진 이번 공황은 마르크스 따위엔 관심도 없던 대중들에게조차 체제 자체의 문제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출처)

그런데 돌이켜보면, 위와 같은 태도, 그러니까 자본주의 경제의 내재적 모순에서 유래하는 공황을, 즉 한편으로는 공황의 이와 같은 본질적 성격을, (그리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공황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에겐 꽤 오래된 습관이다. 다음 구절을 보라.

리카도는 공황에 대해, 즉 생산과정 그 자체로부터 발생하는 세계시장의 일반적 공황에 대해 실제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는 1800년에서 1815년 사이에 벌어진 공황들을, [나폴레옹의] 대륙봉쇄의 결과 시장이 경제적이 아닌 정치적인 이유로 억지로 축소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흉작 때문에 일어났다고, 지폐의 감가, 식민지 작물의 감가 등에 의해 일어났다고 설명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1815년 이후의 공황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일부는 흉작 때문에, 그리고 일부는 곡물가격 하락 때문에 벌어졌다고 설명할 수 있었다. 그 자신의 이론에 따르면 잉글랜드가 유럽대륙으로부터 격리되었던 전쟁 동안에 곡물가격에 상승압력을 가했던 앞서의 원인들은 작동을 멈추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기의 공황들은 부분적으로는 전쟁으로부터 평화로의 이행이 ‘무역 채널의 갑작스런 변경’을 가져와서 빚어졌다고 설명되기도 했다. 이후에 벌어진 역사적 현상들, 특히 세계시장에서 거의 정기적인 주기를 가지고 일어나는 공황들은, 더이상 리카도의 후계자들로 하여금 사실을 부정하거나 이를 우연에 돌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 . .] (강조는 EM의 것. 출처: Karl Marx Frederick Engels Collected Works, Vol. 32, pp. 128-29)

그렇다면, 이후 경제학자들이 공황의 주기성, 그것의 본성을 인정하게 되었는가? 마르크스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이를테면 ‘자본의 과다'(plethora of capital)와 ‘과잉생산'(overproduction)의 구별(이 사항들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생략)을 도입함으로써, 교묘히 본질적인 물음을 회피해갔다.

이상으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과거 리카도주의 경제학자들이 그랬듯, 오늘날의 경제학자들도 공황의 본질, 자본주의 경제의 모순적 성격을 인정하는 척, 그럴싸한 제스처를 취하다가 끝내는 자신들의 기존 입장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말 것이라는 점. (이런 경제학의 성격을 가리켜 Ben Fine은 ‘낡은 경제학 제국주의에서 새로운 경제학 제국주의로의 이행’이라는 표현을 썼다.)

2. 마르크스가 리카도에 대해, 그가 불충분하게나마 19세기 초의 공황들은 설명할 수 있었음을 인정했다는 것이 매우 시사적이다. 이것은, 크게 보면 마르크스(와 그의 훌륭한 선배였던 아담 스미스나 헤겔)이 파악하고 있던 근대사회의 본질, 좀 더 직접적으로는 정치경제학의 본질적 성격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곧 근대사회란 그 물질적 차원의 운동이 정치나 자연과 같은 경제외적 요인들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 그 자체의 내재적인 법칙에 의해 규제되는 사회라는 것, 그리고 정치경제학이란 바로 그러한 경제법칙, 따라서 경제법칙에 의해 규제되는 근대사회의 물적 동향에 대한 학문이라는 것! 이런 생각에 따른다면, 정의상 경제학은 (경제외적 강제에 의해 물적 차원의 운동이 결정적으로 규정되는) 봉건제 사회에 있어서는 온전하게 성립할 수 없다.

공정한 가격, 공정한 소비: 커피값 논란(?)에 대해

요즘에 커피값 때문에 말들이 많은가보다. 뉴스를 잘 보지 않아 몰랐는데, 텔레비전에서도 보도되었나보다. 스타벅스에서 커피값을 올렸나? 잘 모르겠다. 이런 문제와 관련, 다음 기사가 무척 재밌다. 요즘 내가 얼마뒤에 발표를 해야 해서 글을 하나 쓰고 있는데, 그거랑도 관련이 되어, 짬이 별로 없지만 간단하게 한번 써본다.

기사: [왜냐면] ‘반값’ 커피 아닌 ‘제값’ 커피가 필요하다 / 박효원 아름다운가게 공정무역사업처 간사 (링크)

전반적인 문제제기—커피가 당신 손에 쥐어지기까지 고생하는 사람들 많다, 이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줘야 한다—에는 대체로 상식 선에서 동의하나 결론은 물론 추론방식이 좀 이상하다. 아니, 웃기다.

1. 글쓴이가 말하는 ‘반값 커피’를 주장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는데,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제값 커피’를 주장한다는 게 좀 이상하다. 그래서 스타벅스에서 커피값을 올려야 한다는 말인가, 말아야 한다는 말인가? 처음엔 커피값 올리는 게 부당하다고 말하는 듯 하더니, 뒤에 가서는 올려야 한다니 이상하다.

2. 문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기업의 이윤(추구행위)에 대해선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즉 기업의 이윤에 대해 묻지를 않으니, 결론은 ‘제값 커피’, 즉 ‘커피 가격을 올리자’, 좀 더 노골적으로는 ‘힘없는 제3세계 농부들이랑 커피숍 알바들을 위해 우리가 돈 더 내자’가 될 수밖에. 그렇다면 글쓴이는 ‘알바생 처우개선’이라는 조건만 붙는다면 스타벅스 커피값 인상에 동의한다는 얘긴가? (이쯤 되면, 다음과 같이 일갈하실 분도 계시겠다. “아름다운 가게? 마, 니네 알바생한테나 돈 제대로 줘!” 라고.)

그러니까, 이를테면, ‘기업이 폭리를 취하고 있는 현재 구조상, 농부들이랑 알바생들한테도 돈 더 주고, 동시에 소비자가격도 낮출 수 있다. 당장 시행하라’라고 왜 말 못하나? 후달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기업의 이윤(추구행위)에 대한 긍정은 다음과 같은 글쓴이의 문제제기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 . . 대기업이 부당하게 너무 많은 이득을 가져간다는 사회적인 불신이 짙게 깔려 있다. 그런데 소비자들이 반값으로 커피를 마시면 그것이 해결책일까?

3. 이게 대체 무슨 심뽀일까? 말이 되게 이해를 해보면 이런 논리구조가 깔려있는 거다. (1) 기업의 이윤추구행위는 자본주의에서 정당한 거다. 그러니 큰 잘못만 없다면 그들의 행위를 인정하자. (2) 하지만 스타벅스 등은 뭔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커피농부들이랑 알바생들한테 ‘제값’을 지불하지 않는 것이다. (3) 따라서 이들에게 ‘제값’을 지불해야 한다. 모든 것이 ‘제값’만 지불받는다면 아무 문제 없는거다.

‘제값’이라! 대체 커피전문점 알바생의 제값은 얼마일까? (이봐요, 글쓴이. 당신의 ‘제값’은 얼마요? — 그렇다고 ‘shindan’한테 물어보진 마시고…) 자본의 ‘제값’은 이윤이고, 알바생의 ‘제값’은 임금이다. 그러니 위 저자는 자못 진지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자본가가 정당한 이윤을 챙기듯이, 알바생도 그렇게 취급받아야 한다.” 정당한 이윤과 정당한 임금! 마르크스라면, {깡디드}의 한 구절을 인용해 이렇게 비꼬았을 것이다: “가능한 최고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최선의 상태에 있다!”

4. 글쓴이는 ‘비교우위'(comparative advantage)에 대해서도 말한다. 다음과 같이.

커피 위기가 지나간 지금도 주요 생산지인 남미와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은 저개발국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유무역이 양국을 모두 부유하게 만든다는 ‘비교우위론’은 하루 3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세계 27억명 인구에게 말 그대로 ‘남의 나라’ 이야기다.

여기엔 비교우위론에 대한 짙은 오해가 깔려있다. 비교우위론은 무역은 거래당사국들을 ‘부유하게’ 만들어준다는 이론이 아니다. 즉 ‘부유하게’가 아니라 ‘전보다 더’ 또는 ‘거래하지 않을 때보다 더 부유하게’다. 따라서 위와 같은 글쓴이의 비판을 만약 자유무역 옹호론자들이 본다면, “그래서 커피무역을 하지 말자는 얘기냐”라고 받아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글쓴이가 비교우위론을 부정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사실상 다음과 같이 넌지시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커피농부들이 ‘제값’만 지불받는다면, 비교우위론에 입각한 ‘상호번영’이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에게 ‘제값’을 지불해야 한다. 또한 기업은 오직 자기들의 이윤추구에만 혈안이 되어있으므로—그것은 나쁠 것이 없다—우리 소비자들이 나서서 값을 더 쳐주자!”

5. 하지만 문제는 비교우위가 존재하느냐 여부가 아니다. 이 문제는 좀 복잡한데… 그냥 지금은 간단하게만 언급한다. 많은 이들에게 놀라운 얘길지 모르겠는데, 마르크스는 오히려 비교우위, 좀 더 일반적으로는 ‘무역의 이득'(gains from trade)을 인정하는 입장이다(사실 뭐, ‘입장’이랄 것까지도 없다). 다만 그는, 그것은 오직 사용가치적 측면에서의 이득일뿐이고 가치의 측면에서 보면 모든 교환은 그저 등가물끼리의 교환일 뿐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여기서 문제는, 자본주의적 국제무역, 좀 더 일반적으로는 자본의 범지구적 운동이 지구상의 특정 지역들을 ‘커피재배지’로 영구적으로 고착화시킨다는 데 있다. 그는 이미 젊은 시절에 {자유무역에 관한 연설}(1848년)에서, 서인도 지역을 전세계를 위한 커피와 설탕농장으로 만들어놓은 자본주의의 만행을 고발한 바 있다.

여러분들은 커피와 설탕이 서인도제도의 자연스런 운명이라고 알고 계실 것입니다. 두 세기 전만 해도, 당시까지만 해도 상업에 대해선 신경쓸 필요도 없었던 자연은, 사탕수수도 커피나무도 그곳에 심지 않았습니다.

이제 커피의 원산지가 아프리카/중동이라는 게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람들은 그랬던 커피가 왜 지금은 브라질과 같은 중남미에서 집중재배되고 있는지는 여전히 묻지 않는다. 그러니까 커피(값)의 문제엔, 글로벌 자본주의의 역사와 구조 그 자체가 깃들어있다는 말이다. 여기에 대해 문제제기하지 않으면, 문제는 결코 제기된 게 아니다.

6. 간단히 요약하자. “커피값 논란의 원인은 자본주의라고, 구조라고, 착취라고, 왜 말 못해!” 이와 관련해 문득 다음 글이 생각나 걸어둔다.

“소비”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트 피자” 논란에 부쳐 (2010년 10월 1일)

(끝)

로버트 실러, 강남좌파의 사상적 지주

오늘날 (정치)경제학을 비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만약 그 비판의 대상을 찾는다면, 그것은 ‘누구’일까? 당연히 한 두 사람이 아니겠지만, 로버트 실러(Robert Shiller)는 분명 그 중 맨 앞줄에 세워야 할 하나일 것이다.

실러가 최근에 또 하나의 책을 냈다고 한다(참조). 제목은 {Finance and the Good Society}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2). 제목에서 암시되듯이 이 책의 핵심 내용은 “금융을 잘 길들이면 좋은 사회를 이루는 데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다”, 나아가 “그렇게 하는 데 금융은 필수적이다” 정도로 요약될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누구나 하는 말이긴 하지만, 그간 금융의 부작용에 대해 경고성의 글을 써온 그이기에 조금은 예외라고 여길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위에 링크한 {The Economist} 기사를 읽다가 내용이 궁금해 출판사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는 ‘Introduction’을 좀 봤다(여기). 그런데…. 이건 정말, 뜨아..!! 마르크스를 언급하는 부분, 나아가 마르크스가 말한 ‘코뮤니즘'(소련이나 중국의 현실 사회주의 말고)를 전유하는 방식, 그럼으로써 궁극적으로 금융의 이로움을 역설하는…. 말하자면, 이 ‘삼단논법’이 정말 가관이다.

우리에겐 익숙한 ‘시초축적’, 그러니까 생산수단을 박탈당한 무산자가 근대적 임노동자 계급으로, 그리고 반대로 생산수단을 독점한 이들이 근대적인 자본가 계급으로 분화되는 것을 다룬 마르크스의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실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르크스는 왜 노동자들이 자본[=생산수단]에 접근할 수 없는지를 명확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자본주의 하에서는 사회의 목표들이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윗대가리들—자본에 접근할 수 있는 자들—에 의해 설정된다고 암시할 뿐이다. 가난한 노동자가 은행으로부터 신용대출을 하거나 부유한 투자자들로부터 자본을 얻어 사업을 시작하는 게 절대 불가능하다는 암묵적인 가정이 있을 뿐이다. (p. 5)

물론 우리는 위에서 실러가 ‘명확하지 않다’고 하는 것을 꽤 ‘명확하게’ 알고 있으며, 그것은 ‘암묵적인 가정’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물적 현실임도 잘 알고 있다. 그걸 모르는 것은 그저 실러 자신일 뿐이다. 하여튼, 위와 같이 자기 멋대로 문제를 설정해 놓고 바로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이 ‘공자님 말씀’을 내놓는다.

그러나 이상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훌륭한 사업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은,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그것[자본을 구해 사업을 시작하는 것]을 할 수 있다. 우리의 자본주의 제도들이 아직은 그 정도의 이상에 걸맞게 성숙하진 못했지만, 역사를 들여다보면 금융의 민주화, 즉 모두에 대한 금융 기회의 개방으로 향하는 장기추세가 관찰된다. (p. 5)

헛, 금융의 민주화라고? 카드대란도 모르냐?! 그게 니가 말하는 민주화냐!!!…라고 당신은 비웃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설마 우리의 실러 교수가 그걸 모를리가! 그러나 그는, 그런 문제는 그저 사춘기와도 같은, 성숙을 위해 겪어야 하는 불가피한 아픔이라고 보는 듯하다.

하지만 이것은 금융 자본주의(financial capitalism)의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금융 자본주의를 민주화하고 인간화하며 그것의 범위를 확장하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기본적인 문제의식이 마르크스의 새로운 사회에도 깃들어 있다. (pp. 5-6. 강조는 원문.)

이쯤 되면, ‘막장’이란 말도 아깝지 싶다.

아, 조만간 이 책도 누군가가 번역해서 내겠지? 예상 독자는? 뻔하지. 한마디로, 강남좌파. 쩝… 그 자칭 ‘강남좌파’들이 위 책을 들고, 자신들의 한때 마음속 숭배대상이었던 ‘마르크스’와 자신들의 현실적인 숭배대상인 ‘금융’을 함께 품으며 젠체할 거 생각하니, 벌써부터 토나올라고 한다. 기분 드럽네.

마, 니들끼리 잘먹고 잘살어라!

(이쯤에서, 과거 글 자본주의 질서를 둘러싼 정당성 전쟁도 한번 더 되새겨본다. 이 글에서 스티븐 그린과 로버트 실러를 한패거리로 묘사했는데, 공교롭게도 실러의 이번 책은 벌써 그 제목부터가 그린의 ‘선한 가치’를 떠오르게 한다.)

블로그 개편: 포럼기능 추가!!

블로그를, 보시다시피, 조금 바꿨다. 스킨을 바꾼 거야 별 것 아니지만, 포럼 기능을 추가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스킨은, 봄을 맞이해, 산뜻한 꽃그림이 맘에 들어서 선택해봤다.

포럼은, 기존에 우리에게 익숙하던 게시판과 기본적으로 큰 차이는 없는데, 내가 보기엔 게시판에 비해 ‘덜 딱딱하다’. 처음엔 조금 낯설 수도 있겠지만, 조금만 익숙해지면 괜찮을 것이다. 사실 ‘게시판’과 ‘포럼’을 대비시킨다면, 요새는 포럼이 ‘대세’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포럼을 가지고,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자본론}, 나아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다양한 토론의 장을 구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운영자가 쓰고 방문자가 덧글을 다는 ‘제한된’ 쌍방향성을 넘어서는 좀 더 ‘적극적인’ 쌍방향성을 가진 공간 말이다. 원래는 게시판 생각을 했었는데, 진보넷/팔연대 활동가이시자 나의 ‘IT 멘토'(ㅋ) 뎡야핑 님의 조언을 받아들여 포럼으로 한번 가보게 된 것이다. 그에게 감사드린다. (_._)

하여튼… 이 포럼을 통해, 방문자께서는 새로운 토론 또는 질의응답 주제를 만들 수도 있고, 기존의 주제에 참여할 수도 있다. 현재로서는 아무나 글을 쓸 수 있도록 해두었지만, 조만간 회원만 글을 쓸 수 있도록 개편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회원가입을 하면 본인이 올린 글의 관리 등과 관련해 좀 더 편리한 기능을 누리실 수 있을 것이다.

그간 내게 개인적으로 {자본론} 등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을 하는 분들도 좀 있었고 했는데.. 나름대로 성실하게 임했고 또한 그러는 과정에서 스스로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 아쉬웠던 것은, 그런 과정이 아무리 좋아도 대개는 ‘개인적인’ 수준에 머물렀다는 것이었는데, 이제 그럴 일이 크게 줄게 되리라 믿는다. 또한 나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이들이 ‘답변’을 달 수 있고, 또한 일반적으로 ‘토론’에 참여할 수 있으므로, 논의가 좀 더 풍성해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여기서 문제는, 적정 수 이상의 사람들로부터 적정 수준 이상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일텐데, 그런 면에서 지금 나의 시도는 일종의 ‘실험’이기도 하다. 그래서 실은 두려움도 있는데… 이는 단순히 ‘실패’의 두려움은 아니다.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또는 {자본론}에 대한 토론이 (어쩌면 모든 토론이 그렇듯) 상당히 ‘공공적인’ 성격을 갖는 데 비해 그 장을 지금 이렇게 상당히 ‘사적일 수 있는’ 공간에 마련한다는 것, 바로 이러한 어긋남이다. 그러나 이런 걱정도, 결국엔 관심 가진 이들의 진지한 참여로써만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주 보잘 것 없는 솜씨로 만들었기 때문에, 외관부터가 썩 맘에 들지는 않지만, 앞으로 차차 고쳐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토론의 범위, 범주 등도 일단은 매우 두루뭉술하게만 확정해두었다. 역시 어러분들의 참여를 통해 자연스럽게 모습을 갖춰나가리라 믿는다.

끝으로, 이런 포럼을 떠올린지는 꽤 되었지만, 지금 이렇게 ‘급조된’ 듯한 모습으로 이를 내놓는 까닭은, 얼마전 재개된 {자본론} 읽기 모임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모임의 회원들께서는 필히 회원가입을 하셔서, 가열찬 토론의 장을 여는 선봉에 서 주시길 바란다! :) (읽기모임을 위한 포럼을 따로 두고 회원만 볼 수 있게 해볼까도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모임 외부로부터 생산적인 반응들을 얻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 관두었다. 혹시 의견 있으시면 주시길!)

[201203]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이해 비판

[제목]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이해 비판: ‘비물질노동’의 개념화와 측정을 중심으로
[실린 곳]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9권 제1호 (2012년 봄) (링크)

드디어 저널이 출간됐다. 개인적으론 편집자를 좀 많이 괴롭혀서 그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글을 보기좋게 뽑아주어 정말 고맙다. 다음은 위 글의 한글초록이다.

이 글은 인지자본주의론이 제기하는 가치이론 비판을 검토함으로써 그것이 제기하는 문제를 가치이론의 관점에서 어떻게 흡수할 수 있을지를 모색하는 성격을 갖는다. 이를 위해 먼저 우리는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의 가치이론 이해가 단순함을 들어 가치이론을 소극적으로 방어한 다음, 좀 더 적극적으로 가치이론이 그들의 문제의식을 어떻게 껴안을 수 있을지를 논하겠다. 여기서 핵심 주장은,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이 ‘비물질노동’이라고 부르는 형태의 노동은 그 역사적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했을 때에만 가치이론적으로 유의미하게 포착해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의 ‘측정’ 또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역사적 조건 속에서 미결정된 채로 존재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단순히 가능-불가능의 차원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주요 용어] 인지자본주의, 비물질노동, 가치이론, 가치법칙, 역사적 형성, 측정.

마음 같아서는 원문을 여기에 올려놓고 싶지만, ‘도의상’ 그러면 안 될 것 같고… 암튼, 위 글과 함께 이번 저널에 실린 다른 논문들(이번호는 ‘인지자본주의론의 쟁점’이라는 특집으로 꾸며졌다)을 통해 논의가 한층 고양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궁금하신 분들은… 도서관이나 서점으로 고고씽! ㅋ

(참고로 {마르크스주의 연구} 이번호엔 H님의 글도 함께 실려있다.)

나 개인적으로 봤을 때, {마르크스주의 연구}의 이번호는 상당히 기념비적인 성격을 갖는다. 물론 이런 성격이 당장부터 두드러지진 않겠지만 말이다. 왜 그러냐?! 특집을 채운 논자들의 면면을 보면 금새 그 까닭이 드러난다. 일반논문이나 서평 외에, ‘특집’ 꼭지에 총6개의 논문이 실려있고, 조정환 자신의 논문을 빼면 모두 다섯 명의 논자가 인지자본주의론을 비평하고 있는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다섯 명 중에서 자그마치 세 명(나와 H님을 포함해)이, 그간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젊은’ 연구자라는 거다!

적어도 지난 20년 정도 한국의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 연구동향을 떠올려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이례적인 일인지 대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문화연구분야 정도만 빼면, 내 생각엔 다른 사회과학 분야에서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연구가 대개 이렇다. 한마디로 말해, 그간 이 동네는 대가 끊겨있었던 셈인데… 이번에, 그러니까 내가 지금 언뜻 생각하기론 약15년만에 거의 처음으로 ‘우리 여기 살아있다고!’라고, 그것도 ‘집단적으로’ 외친 것이다!!

물론 그간에 사람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체로 몇몇 개인의 산발적인 연구였고(나 자신도 좀 뒤늦게 합류하긴 했지만 그 중 하나였다), 그렇다 보니 그런 연구들이 어떤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정도까지는 못 되었다. 아니, ‘바람’을 일으키기는커녕 기존의 선배 연구자들의 정당한 주목 내지는 건전한 개입을 받지 못한 채 잊혔던 게 아니었나 싶다(물론 어느정도는 ‘함량미달’이어서도 그랬겠지만ㅋ).

바로 이런 의미에서, 나는 이번 특집호에서 ‘젊은’ 연구자 셋이 한꺼번에 목소리를 냈다는 사실 자체에 주목하는 것이다. 따라서 조정환 선생께서도 지금까지처럼 무슨 ‘선지자’처럼 굴지 마시고 이번엔 비판에 귀 좀 기울였으면 좋겠다. ‘우리’는 그가 이제껏 상대해야 했던 ‘논적들’과는 전혀 다르다. 그와 ‘구원'(舊怨)도 없고, (그가 맨날 욕하는) ‘스탈린주의’도 모른다. ‘낡은’ 틀로, 거기에 잘 들어맞지도 않는 우리를 재단하려고 한다면, 그는 이미 구린내 풍기는 ‘꼰대’일 뿐이다(실은 이미 어느정도는 그러고 있다).

암튼, 기분 좋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