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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관점의 지성사적 의의

0. 적어도 서유럽에서 “사회”라는 것이 핵심적인 문제로 떠오른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닌 것 같다. “사회”를 논하게 되었다는 것은 곧 하나의 학문으로서 “경제학” 즉 당시 표현에 따르면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이 나타났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회의 (의미있는) 출현과 정치경제학의 (의미있는) 출현은 대체로 일치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것은 대체로 17세기 초중반 정도로 봐도 문제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17세기 초중반 이전엔 사회가 없었단 게 아니다. “정치경제학”이라는 용어도 사실은 16세기 중반쯤부터 나타났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현실의 발달이 인간의 의식에 반영되는 방식이다.

1. 인간이 올바른 삶을 사는 것 — 그것을 다루는 것이 전통적으로 학문의 중요한 하나의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선한가, 악한가? 인간이 선하다면 그런 본성이 잘 발휘될 수 있어야 할 것이고, 악하다면 그런 본성은 적절하게 억제되어야 할 것이다. 개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인격수양의 문제겠지만, 개인이 몸담고 있는 사회(여기서 사회란 그냥 앞의 개인이 속한 “집단”이라고 해도 족하다)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제도의 문제일 것이다. 동양사상에서도 성악설이니 성선설이니 하는 게 있지만, 서유럽 지성사에도 비슷한 대립이 존재한다.
 
인간이 선하냐 악하냐를 다루는 까닭은 간단하다. 인간사라는 게 복잡하기가 짝이없기 때문이다. 주위에 맘씨 좋은 이웃도 많지만, 여전히 세상은 전쟁과 각종 범죄로 들끓고 있다. 말하자면 전통적으로 서구사상에서는—이는 동양사상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게 아니라 동양사상은 논외에 있다는 뜻이다—오늘날 의미로 “사회문제”에 해당하는 것들까지도 인간본성에 대한 탐구 속에서, 그리하여 개인의 선악의 문제라는 관점에서 다루곤 했던 것이다.

2. 현대적 의미에서의 “사회”의 출현, 또는 인식은, 인간본성을 둘러싼 위와 같은 대립에 새로운 차원을 부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여기서 사회란, 매우 복잡한 그 무엇이다. 작고 단순한 단위, 즉 가족이나 작은 영지/지역 등으로 환원되지 않는, 그러니까 그것을 이루는 개체들의 단순한 총합 이상의 그 무엇. 이리하여 우리는, “사회”에 대한 별도의 과학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래서 고작해야 개별 가계의 운영과 관련된 기술이었던 “경제(학)”과는 구별되는 “정치경제(학)”을 필요로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차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개인의 선악이 곧 전체의 선악과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다“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런 관점은 맨더빌(Bernard de Mandeville: 1670-1733)의 유명한 《꿀벌의 우화》(1714)의 제목에 명확히 나타난다. 이 책의 원제목은 다음과 같다: “꿀벌의 우화, 또는 사적 악과 공적 이익“(Fable of the Bees: or, Private Vices, Publick Benefits).
 
어떻게 보면 인간본성을 선하다고 하는 것보다 악하다고 하는 게 여러모로 편하다. 앞서 말했던 범죄나 전쟁 등을 쉽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선의 강조는 악의 만연을 거꾸로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젠, 개체의 총합 이상의 그 무엇으로서의 사회를 개인과 대립시킴으로써, <악+악=선>이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물론 여기서 “악하다”라는 것은, 언젠가부터는 “자기이익(self-interest)을 추구한다“로 뭉뚱그려지고 굳어졌다.

3. 다시, (정치)경제학의 출현은 위와 같은 의미에서의 사회의 출현과 궤를 같이 한다고 했다. 당연하다. 아마도 이 대목에서 우리는, 오늘날 경제학이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개인을 출발점으로 한다는 사실만 떠올려도 충분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 맨더빌 같은 사람이 이런 생각의 시조 중 하나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기심”이 처음부터 (정치)경제학의 첫번째이자 유일한 원리는 아니었다. “경제학의 아담”이라 불리는 아담 스미스(Adam Smith: 1723-1790)조차도 그렇게 보지 않았다. 흔히 스미스가 “이기심”을 중심으로 한 경제학의 원조라고 불리지만 그것은 후대의 사람들이, 즉 스미스를 제대로 읽지도 않고 스미스에 대해 지껄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신화에 불과하다. 스미스는 “이기심”보다는 “자기애”(self-love)라는 표현을 선호했는데, 그의 사상 전체적으로 보면 “자기애”는 그와 대립되는 성향인 “동감”(sympathy)와 함께 인간본성을 구성한다고 스미스는 봤다.

4. 이렇게 “사회”라는 것의 특수한 지위가 인식된 것이 엄청난 의의를 가짐을 염두에 두면, 그리고 그것이 “(정치)경제학”의 발달에 미친 결정적인 영향을 고려하면, 마르크스(Karl Marx)가 사상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것은 마르크스 개인의 문제는 아니다.) 결국 그는, 지성사적 의미에서 “(근대)사회”의 출현이 갖는 의의를 끝까지 밀어붙임으로써, 문제의 중심을 “개인”에서 “사회”로 옮겨놓았던 것이다. 알튀세르(Louis Althusser)가 말한 “인식론적 전환”이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비록 알튀세르 자신은 이런 의의를 충분히 음미하지는 못한 것 같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그의 표현을 빌자면, “그는 스스로 그런 의의를 발견해놓고도, 보지는 못했다.”)

마르크스를 통해 이제 정치경제학은 “사회”를 적극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한다. 이제 그것은 인간본성이라는 흐리멍텅한 선험적 가정 대신, 사회라는, 즉 인간을 둘러싼 관계들의 구조라는 엄연한 물적 현실(material reality)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서 구성되며, 또 바로 거기까지로 자신을 제한시킨다. 어떻게 이런 경제학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근대의 가장 중요한 지적 성취로부터의 “퇴보”가 아니겠는가.

이 “퇴보”에는,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어렵사리 구성된 “사회” 관점—그리고 구체적인 물적현실에 주목한다는 의미에서 “유물론적” 관점(그래, 이젠 자신있고 분명하게 그것을 “유물론”이라고 부르자)—을, 구태의연한 “개인”의 차원으로, 또는 추상적인 “인간”의 차원으로 해소시키는 다양한 시도들이 포함된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오늘날의 경제학들이 그렇지만, 그것에 대한 우파적 비판(특히 최근 범지구적 공황의 국면을 맞아 경제학을 반성한다는 명목으로 제출되는 각종 논의들. 이런 논의들의 특징은 그동안 경제학이 미처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던 개인들의 “심리”나 구체적인 “행동동기”에 주목한다. 예컨대 작년 초에 출간되어 국내에도 번역된 《야성적 충동》 같은 시도)은 물론 몇몇 좌파적 비판들(예컨대 요즘 유행하는 “호혜성” 운운)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