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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생각] 크루그먼, 맨큐, 월가시위, “진짜 경제학자 구함”

간만에 블로깅. 약간 묵혀뒀던 것으로. . .

요새 “점령하라(occupy)” 운동으로 말이 많다. 우리나라에선 처참하게 끝난 것 같지만, 미국에선 그 파급력이 엄청나, 하버드에선 수업거부 사태까지 빚어졌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니, 한국에서도 다시 한 번 불길이 타오르길 기대할 수도 있겠다.

 

— 한때 “20:80 사회”라는 표현이 유행하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그런 표현이 현실을 과장한다며 이를 기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점령하라” 운동의 모토는 “우리는 99%다”이니, 이것도 뭐든 극단적으로 만들어버리는 신자유주의가 빚어낸 촌극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경제적 위계의 최상위에 있는 1%를 규탄하는 현재의 운동은 과녁을 제대로 잡은 것일까? 미디어를 통해 많은 논란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다소 뒷북이긴 하지만, 미국의 의회예산국(Congressional Budget Office)이 최근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위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 같다.

1979~2007년 사이 세후 실질소득의 증가

{1979~2007년 가계소득분포의 추이}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의 핵심은 위 그림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지난 약 30년간 소득수준으로 봤을 때 하위 20%의 실질소득증가는 약 20%에 지나지 않는 반면, 이 비율은 소득분위가 20%씩 올라갈수록 커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상위 1%의 소득증가는 무려 300%에 육박하고 있다. 절대적 관점에서 보면 “빈익빈”은 아니더라도 이는 분명 “부익부”이며, 또한 “부익부”이므로 적어도 상대적으로는 “빈익빈”이다. 다음 그림은 또 어떤가.

소득집단별 세후총소득의 몫

이 그림은 위에서 말한 “절대적 부익부”와 동반된 “상대적 빈익빈” 현상을 매우 잘 보여주고 있다. 즉 전체 국민소득에서 하위 20%와 상위1%가 차지하는 몫이 1979년엔 거의 비슷했는데, 2007년에 이르면 전자의 몫은 과거에 비해 다소 줄어든 반면 후자의 몫은 2배 이상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더욱 재밌는 사실은 상위 20% 중 최상위 1%를 제외한 19%와 나머지 1%를 비교했을 때 나타난다. 즉 전자의 소득몫은 35%대에서 정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는, “20:80 사회”보다는 “1:99 사회”가 오늘날 (적어도 미국의) 현실을 더 잘 묘사한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도 있단 얘기다.

그렇다면 이는 오늘날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시위의 정당성을 말해주는 것인가? 일단은 여기에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어떤 의미에선 “1%”라는 것도 지나치게 크게 잡은 수치라 볼 수도 있다. 이에 관해선 약 1주일 전에 Paul Krugman 교수가 쓴 블로그 글을 참조할 수 있겠다. 위에서 내가 언급한 것과 같은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그는 몇 년 전에 같은 기관에서 나온 비슷한 성격의 보고서를 함께 상기시키고 있다. 다음 그림을 보라.

요 전의 것과 비슷한 그림인데, 여기서는 상위 1%를 좀 더 세분해서 최상위 0.1%와 그 아래 0.9%의 소득몫을 비교하고 있다. 놀랍게도 전자의 소득몫이 1979년부터 2005년까지 약 사반세기 사이에 엄청나게 증가해, 2005년에 이르면 이들의 소득이 역시 부의 위계에서 최고층을 이루지만 이들보다 약간 낮은 곳에 속한, 그러나 수적으로는 9배에 달하는 사람들이 가진 소득에 맞먹는다는 얘기다! 이런 그림을 보여주면서 크루그만 교수는 미국은 바로 그 0.1%의 사람들에 의해 움직이는 “과두제” 사회라고 결론짓고 있다. 당연히 틀린 얘긴 아니다.

 

— 크루그만, 하여튼 재밌는 사람이다. :) 그런데 그의 위 글을 두고 하버드의 맨큐(N. Gregory Mankiw) 교수가 간략한 코멘트를 붙였다. 긴 얘기 할 것 없이, 솔직히 참으로 머리에 뭐가 들었나 하는 생각밖에 안 든다. 저게 하버드 교수면, 나는. . . ㅎㅎ

애초 크루그만 얘기는, 교육을 더 받으면 소득이 높아진다는 얘기가 있는데 실제 현실을 보면 교육과 상관없이 미국에서 가장 잘 사는 사람은 매우 소수의 “과두들”이라는 것이었다(물론 이 “과두들”이 교육을 상대적으로 잘받았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맨큐는 이런 주장이 터무니없다면서, 크루그만이 교육의 효과를 잘못 제시하고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즉 교육의 효과란 “1년 더 교육받으면 소득이 10% 높아진다”라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며, 그 효과는 확률적으로 분포할 것이므로 몇 년간의 대학교육은 어떤 이에겐 10% 정도의 소박한 소득증가를 가져오겠지만 다른 어떤 이에겐 1,000%라는 짜릿한 소득증가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식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교육은 소득이 높아질 수 있는 가능성을, 즉 어떤 사람의 소득을 최상위 1%에 속하게 만들어줄 가능성을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는 얘기다.

과연 웃기지 아니한가?!! 이로써 하버드 대학교 경제학과의 대표적인 교수이자, 부시행정부시절 대통령 경제자문위 위원장이었으며, 전세계적으로 가장 인기있는 경제학 교과서 {경제학 원리}의 저자인 저 위대한 맨큐 교수께서, “대학교육을 받으면 여러분들은 소득수준 최상위 1%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 셈이다. 세상에. . . 이 정도면 몇몇 학생들이 맨큐 수업을 거부할 만도 하지 않은가?!! 아니, 아예, 대학을 거부해야 할 상황이다. . .

 

— 말이 나왔으니… 수업거부 얘기도 재밌다. 한쪽에선 수업거부를 하고, 다른 한쪽에선 수업사수를 하고… 일단 이런 모습. . . 어린 학생들이 나름 치열하게 자기들 주장을 공개적으로 내놓으며 서로 자웅을 겨루는 것은, 뭐 나쁘진 않다. 그런데 맨큐 교수에 따르면 5~10%의 학생들만이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다는데… 이건 좀 실망스럽다. 물론 실제 수강을 하지 않는 학생들이 자리를 채우기도 했겠지만, 어쨌든 5~10%의 결석률이 수업거부라면, 나는 매번 수업거부를 당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 울적하기도 하고.. ㅎㅎ

어쨌든 수업거부를 하는 학생들을 비난하는 이들의 논리는 크게 두 가지인 것 같다. 첫째는 어차피 “1%”에 속할 가능성이 많은 하버드 녀석들이 “나는 99%다”라고 떠드는 게 영 못마땅스럽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업거부하는 애들은 공부 잘 못하는 애들, 즉 맨큐의 강의나 교과서를 비판할 능력과 자질이 없다는 것이다. 뭐… 기본적으로 둘 다 타당한 면이 없진 않다. 특히 후자에 관해선, 이를테면 이번에 실제로 수업거부하는 친구들이 그러듯이 “맨큐의 강의는 편향되어 있다. 이는 그가 부시행정부 시절에 맡았던 역할과도 관계 있다”라는 식으로 비판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만약 “비판”이 이 정도라면, 맨큐로서도 할 말이 매우 많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비판해야 하느냐?! 마침 최근에 내가 쓴 글도 있고 하니, 이 점에 대해 더 얘기할 필요는 없겠다.

 

— 하지만 수업거부하는 하버드 경제학과 학생들에 대한 “수업도 제대로 안 들은 녀석들이…”라는 비판을, “점령하라”에 (몸으로든 마음으로든) 참여하는 대중들을 향해서도 퍼붓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실제로 이런 비판은 다양한 형태를 띤다. “아이폰만 좋아했지 애플 주가도 모르는 녀석들이…”, “대안도 없으면서…” 등등. 그러나 어차피 대중 차원의 현재와 같은 (상당 정도로 자생적인) 운동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딱히 뭔가를 “알아서” 거리에 나오는 것도 아니고, 무슨 거창한 “대안”이 있어서 현재의 status quo를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 촛불시위에 대해서도 비슷한 얘기들이 많았는데… 어떤 이들은 우리의 촛불시위나 현재의 월가시위를 보면서 “저항의 새로운 형태”라고 추켜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정반대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평가한다면,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 비로소 등장한 “저항의 새로운 형태”는, 오늘날 촛불시위/월가시위 등을 “새롭다”라고 하는 이들이 흔히 “낡은 형태의 저항”이라고 치부하곤 하는 바로 그 “고전적인” 저항, “노조나 정당 등을 통한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조직적인 저항”인 것이다! 반대로 오늘날의 촛불시위/월가시위 등은 그야말로 “낡은 형태의” 저항인데, 이에 대해선 E.P. Thompson 같은 양반이 잘 밝혀놓았던 것 같다.

마침 최근에 {뉴욕타임스}에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Roger E. Backhouse 대인께서 적절한 글을 쓰셨다(이 글을 내게 알려주신 NeoPool님께 감사를). 그는 월가시위에 나선 이들이 내놓는 질문들은 전적으로 정당하며, 만약 그것들이 다소 투박해 보인다면, 이를 세련되게 가다듬는 것은 경제학자들의 몫이라고 역설한다(그러고 보니 나도 예전에 비슷한 취지의 글을 하나 썼다). 그러나 그는, 현대 자본주의 경제의 심원한 모순들에 관한 그러한 문제들을 다룰 수 있을 정도의 깊이있고 폭넓은 시야를 갖춘 경제학자는 오늘날 보이지 않는다며 탄식한다. 적어도 맨큐와 같은 이들이 오늘날의 경제학자를 대표하는 한 사람이라면, 백하우스의 탄식은 분명 “이유 있다”고 하겠다. (끝)

Shiller on stimulus: 고용이냐 성장이냐

예전에 김수행 선생의 대중강연을 소개했었는데(링크), 그때 그가 이야기한 많은 인상적인 내용들 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이, 경제의 상태 즉 경제가 현재 위기에 처해있느냐 여부는 크게 두 가지 지표에 달려있다는 거였다. 그 두 지표란 바로 “경제성장률”과 “실업률”이었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 두 가지 지표에 의거하지 않은 경제의 현상태에 대한 진단이나 전망은 모두 가짜라는 것. 이를테면, 요즘 경제와 관련된 미디어의 기사들을 보다 보면, “주가가 반등하고 있다”라는 등의 근거를 들어 경기가 좋아졌다거나 좋아질거라는 주장을 종종 마주치곤 하는데, 이런 것들은 죄다 헛소리라는 얘기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경제성장률과 실업률의 추이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경제성장률은 대체로 국민총생산(GDP)을 이용해서 구한다. 그러나 이 GDP라는 것은, 이를테면 사람들이 죄다 굶어죽고 있어도 증가하는 게 가능하다. 그러니까 요새 나오는 “jobless growth”라는 표현이 이런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현재와 같은 “저성장”과 “고실업”이 동반된 경제위기 상황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정책의 포커스가 맞춰져야 할 부분은 어디일까? 다시 말해, “저성장”을 먼저 치유하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고실업”을 먼저 없애려고 해야 할까? 물론 장기적으로 보자면야 이 둘이 함께 간다고 할 수 있겠지만, 단기적으로는 얼마든지 괴리될 수 있고, 또 (“jobless growth”라는 표현이 유행하고 있는 데서 볼 수 있듯이) 둘의 괴리현상을 어떤 이들은 아예 “현대경제의 질적 변화”의 결과로 보고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아마도 4대강 사업이라는 것이 현재의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정부의 핵심 정책이 아닐까 싶다. 즉 대규모 토목사업으로 고용을 늘리고, 나아가 이를 토대로 경제 전반에 걸친 선순환(virtuous cycle)을 일으켜 궁극적으로는 경제성장도 이룬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이 4대강 사업이라는 게 “고용”에 미치는 영향이 그다지 신통치 않은 모양이다(링크1, 링크2). 아마도 정부로서도 난감한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미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 우리와 마찬가지로 미국도 현재 파탄난 경제로 앓고 있다. 특히 높은 실업 때문에 골머리를 썪이고 있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현재 실업률이 10%에 조금 못미치게 나오는데, 하지만 통계에 잡히지 않고 있는, 이를테면 초장기 실업자들–이들은 실업급여를 신청할 수도 없다–까지 더하면 그 수치는 훨씬 더 올라갈 것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미국 정부는 과거 “뉴딜”을 연상시키는 대규모 토목공사들을 여기저기서 발주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 효과가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신통치 않다는 거다.

마침 이런 문제에 대해, 예일대의 로버트 실러(Robert Shiller) 교수가 <뉴욕타임스>에 좋은 글을 썼다(링크). 그의 주장의 요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현재 미국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공사들은 자본투자를 통한 경제성장 효과를 거둘 수는 있을지 몰라도, 직접적으로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는 효과가 매우 적다; (2) 현재 가장 시급한 것은 실업을 줄이는 것이므로, 정책의 포커스가 “일자리 창출”에 맞춰져야 한다; (3)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집약적인 부문에 정부의 자금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노동집약적인 부문”이란 무엇일까? 이제껏 우리는 “공사판”이 노동집약적이라고 생각해왔지만, 현재 드러나고 있듯이 그쪽은 오히려 자본 집약적이다. 그러니까, 결국 토목공사는 “자본”이 하는 것이고, 그 자본은 그 토목공사를 “노동” 대신 “기계”만으로도 할 수 있다는 얘기. 이에 비해, 실러 교수가 주문하는 것은, 그렇게 고용을 자본을 거쳐 “간접적”으로 창출하려 하지 말고 “직접” 창출해내라는 것. 여기서 하나 더 재밌는 것은, 그가 말하는 노동집약적 부문이란 곧 서비스업이다. 그것도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교육, 공공보건 및 안전, 도시 기반시설 보수/확충, 청년 프로그램, 노인돌보기, 환경보호, 문예, 과학연구” 등.

이런 것들이 과연, 고용을 창출하는 데는 효과가 있다고 치더라도, 경제 전체적으로 봤을 때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것일까? 경제학을 어설프게 배운 사람들은 아마도 고개를 젓겠지만, “효율적 자원 배분”이라는 차원에서 보더라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게 실러 교수의 설명이다. 즉 위와 같은 부문들에서 창출되는 benefit들은 가격이 매겨지기 어렵고, 따라서 단순한 비용-산출 분석(cost-benefit analysis)을 통해서는 당연히 비효율적이라고 판명이 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경제의 체질을 개선하고 더 나은 비즈니스 환경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얘기다.

글쎄… 이런 주장들을 MB와 그 측근들이 귀담아 들을리는 만무하고… 결국엔 사회적으로 정부를 압박해서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할 수밖에 없다. 하여간 이론적으로는 실러 교수와 같은 이들의 접근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이번 얘기는 아주 좋다. ㅎㅎ

“직접 일자리를 만들어내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