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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재정위기’: 정말 위기인가?

‘재정절벽’, ‘부채천장’, ‘1조달러 동전’… 미국경제에 대해 말이 많다. 보통 사람들은 신문을 봐도 대체 뭔 소리가 오가는지, 어떤 사항들이 문제가 되는 것인지 알기가 참으로 어렵다. 아마도 국내에 나오는 기사들이 대부분 깊고 일관된 분석 대신 단편적인 사실 전달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이 블로그를 거의 혼자서 채워놓고 계신 heesang님의 몇몇 포스팅들이 많은 도움을 드렸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어렵다. 나도 모르겠다. ㅠㅠ 그냥 ‘사실들’ 말고, 개략적인 ‘판단’을 도와줄 수 있는 뭔가가 없을까? 이런 ‘열정적인 어려움’을 가지고 계신 분들께 이 포스팅을 바칩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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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영국의 경제일간지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가 미국의 재정위기(fiscal crisis)에 대해 이례적으로 크게 다루고 있다(링크). 이번 포스팅에서는 지난 한주 내내 이어지고 있는 이 씨리즈에 대해 간단하게 리뷰하기로 한다.

시작하기 전에… 내용면에서도 얻을 게 많지만, 나는 그 ‘내용’보다도 그들이 그것을 다루는 ‘태도’가 더 재밌다. 무슨 얘기냐면, 그들의 태도란 게 ‘중립성’과는 아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태도는, 굳이 말하면 미국 민주당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렇다고 그것이 민주당의 (공식적이든 사실상이든) ‘기관지’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객관성’이 곧 논쟁의 양 당사자 사이를 점하는 ‘중립성’은 아님을 새삼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은 과거 2007/08년 ‘금융공황’ 당시에 {파이낸셜 타임스}를 중심으로 ‘국유화’ 논의가 퍼져나갔다는 데서도 드러난 바 있다.)

[사족 1] 과거엔 좌파들이 이데올로기에 갇혀 합리성을 잃는다고 종종 여겨졌지만, 오늘날엔 우파들이야말로 이데올로기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가 되었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파이낸셜 타임스}의 이 기사 참조.

[사족 2] 나는 {파이낸셜 타임스}가 겁없이 ‘국유화’를 주장하고 ‘전국민의료보험체계’를 옹호하는 것이 다른 한편으론 노동자계급 운동의 약화의 한 결과이기도 하다고 본다. 경제가 파탄났을 때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성난 대중이 ‘국유화’과 그에 따른 ‘금융시스템에 대한 대중의 통제’를 주장했다고 해 보자. 그랬다면 과연 어떻게 {파이낸셜 타임스} 따위가 감히 ‘국유화’를 옹호할 수 있었겠는가. 여기서 확인되는 또 한가지 교훈은, ‘국유화’라는 것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웅.. 잡설은 그만 두고 본론으로…;;; 현재 문제가 ‘재정위기’이긴 하지만 그 주된 원인으로 엄청난 의료비 증가가 꼽히고 있는 만큼, ‘의료체계개혁’도 중요한 한 주제로 다뤄지고 있다.

 

  • 미국의 부채 딜레마, 본질은 무엇인가?

‘엄습하는 위기, 개혁의 기회'(링크)라는 글에서 Robin Harding은 장기적 안목에서 현재 미국이 직면하고 있는 위기가 무엇인지를 탐구한다. 그는 최근 언론과 각종 SNS의 타임라인을 달구고 있는 ‘재정절벽’이니 ‘부채한도 조정’이니 하는 단기적인 문제들은 결코 중요한 이슈가 아니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국 재정과 관련된 진정한 선택은 … 나이 든 인구를 위해 돈을 지불할 것인가,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다. 이에 대한 대답이 21세기 미국경제의 성격을 결정할 것이다. … 선택은 부자들에게 약간의 세금을 더 걷을 것인가, 아니면 째째하게 교육예산을 삭감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미국이 장차 어떤 나라가 될 것이냐에 대한 것이다.

카~ 멋지다. 이런 표현, 배워야 한다. 어쨌든 그는, 현재 말이 많은 재정적자는 그렇게 심각한 게 아니지만 현재 추세대로 2020년에 이르면 심각해질 거라고 본다. 2020년이라면 불과 7년 뒤인데, 그러면 왜 2020년이냐? 바로 그때에 이르면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가 70대가 되어 의료비가 급등할 것이기 때문이다. 무슨 얘기냐면, 글쓴이는 장차 미국의 재정에 가장 큰 위협요인으로 의료비, 그 중에서도 은퇴자를 위해 제공되는 ‘메디케어’를 꼽고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잠재적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그는 (1) 재정지출 감축, (2) 증세, (3) 의료체계 개혁 노력 등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말한다. 뭐 논리는 간단하다. 첫째, 재정균형을 위해 재정지출을 줄이는 것이 고려되어야 하겠지만, 그것은 현재와 같이 고령화가 진행될 때에는 가능하지도 않고 (경제성장에 부정적이므로) 바람직하지도 않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선별적 복지’가 힘을 얻고 있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세계적으로는(즉 선진국에서는) 부자들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보건재정지출에 찬성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 (메디케어나 사회보장을 주장하는 민주당 인사들이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대규모 증세는 가능하긴 하지만 바람직하진 않다. 미국의 경우, 국제표준에 비해 낮은 소비세 등을 높이는 것, 그러니까 제한적 증세는 바람직하지만 자칫 무분별한 증세는 성장동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그보다 더 시급한 것은 잘못된 과세체계를 바로잡는 일이며, 이는 (세수증대에도 기여하면서 동시에) 성장동력도 될 수 있다.

끝으로, 향후 미국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의료비용을 잡아야 한다. 현재 미국은 국내총생산(GDP)의 17.4%를 의료비(공공+민간)에 지출하고 있는데, 이는 OECD평균(9.6%)를 훨씬 넘는 수치다.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여기서 핵심은 ‘환자들이 불필요한 처방을 요구하거나 의사들이 그것을 제공할 유인을 없애는 것’이다. 요컨대, 의사가 단지 환자를 진찰했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의료보험료를 지급하는 게 아니라 이를테면 환자의 상태를 개선시켰을 때, 예방적 조치를 취했을 때, 누군가를 일년 동안 꾸준히 돌봤을 때 지급하는 방식으로 제도를 다듬을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의회가 메디케어 비용에 대해 공격적인 제한을 두고 이를 증세와 정부지출 감축으로써 뒷받침할 수 있겠다… 미국을 위협하는 재정적 도전은 엄청나다. 그러나 만약 워싱턴이 오늘날의 재정적자에 대한 집착만 거둔다면 그 도전은 해결될 수 있다.

 [사족] 이상과 같은 기사가 나오자, Paul Krugman이 환호성을 질렀다. ‘씨바, 그게 내가 오래전부터 했던 얘기잖아’라면서(링크). 하여간 재밌고 유쾌한 사람이다. :)

 

  • 미국의 재정적자, 진짜 문제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별 문제 아니라는 평가를 중심으로 기획이 짜여졌다. 먼저 앞서 소개한 Harding의 글과 같은 맥락에서, 씨티그룹의 Peter Orszag은 재정지출이 아니라 보건의료체계가 문제라고 주장한다(링크). 한편 오래 전부터 민주당 정권의 경제자문역으로 활약해온 Lawrence Summers는 재정적자가 문제라고는 해도 그에 대한 집착이 경제성장을 방해할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링크).

Summers에 따르면 현재 미국은 재정적자(fiscal deficit) 말고도 다양한 ‘deficit'(결핍)에 시달리고 있는데, 후자를 해결하기 위해 전자에 대한 문제제기는 일정 정도 보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그는 현재 미국은 ‘사회기반시설 결핍'(infrastructure deficit)이 심각한데, 만약 (단기적으로 재정적자 증가를 감수하고) 여기에 재정을 투입해서 일정한 경제성장을 이뤄내고 그 결과 세수를 늘릴 수 있다면 재정적자는 오히려 완화될 수도 있다는 논리다. 더구나 현재 세계적으로 저금리 상황이므로 대규모 투자를 하기에 좋은 시기이기도 하다.

[사족] 하버드대 교수이기도 한 Summers의 이러한 견해는 최근 국내 일간지에도 소개된 바 있다(링크). 이런 주장이 한편으론 정부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좌파들에게 유의미할 수는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MB의 ‘사대강 악몽’을 연상시키는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현재 한국 상황에서는 그와 같은 정부의 경기부양책은 ‘부동산 시장의 억지 부양’과도 일정 정도 연결되어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그런 의견에 무조건 따라서는 안 되며, 왜 유독 {매경} 같은 보수경제지가 그런 주장을 선전하는지도 생각해볼 일이다.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Martin Wolf의 주장은 가장 강력하다. 벌써 제목부터가 ‘미국의 재정정책은 위기에 처하지 않았다’다(링크).

미국은 국내외에서 엄청난 도전들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미국의 재정상태는 그 중 하나가 아니다. 이는 매우 논쟁적인 진술이다. 워싱턴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란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미국 연방정부가 파산 직전에 있다고 결론짓는 것도 물는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렇다. 미국이 장기적으로는 재정적 도전에 직면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 미국이 가지고 있는 비효율적인 보건의료체계에서 치솟는 비용 때문이다. 그렇다. 미국이 재정정책을 둘러싼 날선 논쟁의 와중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의 역할을 둘러싼 철학적 견해차이 때문이다. 그렇다. 미국이 단기적으로는 대규모 적자재정을 운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금융위기의 결과이다.

아.. 글이 완전 물이 올랐…;; 위에 요약된 대로, 결국 그는 현재 마련되어 있는 정부재정운영에 대한 법안들만 제대로 실행해 재정을 좀 더 건전하게 운영하고, 동시에 의료체계개혁을 단행하면 문제될 게 없다고 보는 것이다. 현재 이른바 ‘재정위기’라는 것이 근본적으로는 금융위기의 결과이므로, 문제는 금융위기에 의해 파탄난 경제를 회복시키는 것이고, 이때 정부의 역할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우리의 Wolf 선생의 의견이다.

흠… 이상과 같이, 대체로 {Financial Times}는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동, 즉 미국 의 재정적자가 심각해 연방정부가 거의 파산 직전에 있다는 문제제기에 대해, ‘근거없음’이라는 판정을 내리고 있다. 그러니 재정절벽(fiscal cliff)이나 부채상한조정(debt ceiling) 등의 문제는 경제적이라기보단 정치적인 이슈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재정적자 문제가 심각하게 불거질 수도 있는데, 현재와 같은 비효율적인 의료체계가 지속된다면 특히 그러하다. 따라서 이른바 ‘오바마케어’와 같은 의료개혁을 통해 공적 및 사적 의료체계를 효율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주석] 여기에서 우리는 이른바 ‘복지국가’의 핵심적인 요소인 ‘사회적 의료체계’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되새겨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의료를 공공재로 보고 국민의 건강을 공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사회적 삶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또한 동시에 자본주의 체제의 효율성을 높여주는 기제이기도 하다. 현재와 같이 좌파가 지리멸렬할 때 미국과 한국에서 심지어 우파들까지 나서서 옹호하고 있는 ‘공공의료’란 그럼 어느쪽일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현재 미국의 재정, 즉 세입과 세출 구조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문제들은, 이번 {파이낸셜 타임스}의 씨리즈의 세째날과 넷째날에 다뤄지고 있다. 특히 우리에겐 {이번엔 다르다}라는 책으로 친숙한 하버드의 경제학 교수 Kenneth Rogoff는 현재 미국의 재정위기의 뿌리에 있는 다양한 문제들—미국의 세계경찰역할 전망(국방비), 정부역할에 대한 이견, 인프라 투자, 이민, 보건의료 등—을 들춰내면서, ‘정부의 과세와 지출과 관련해서는 얼마나뿐 아니라 어떻게도 매우 중요하다’라는 상식을 새삼 일깨우고 있다. 그는 앞서 소개한 다른 논자들보다는 훨씬 비관적인 전망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이번만큼은 미국이 적절한 해결책을 찾아내기 어려울 것 같다는 조심스런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주석] Rogoff 교수에 대해서는 {조선일보}에 몇년 전에 난 기사에 잘 소개되어 있다(링크). 체스 특기생으로 대학에 갔다는 게 재밌다ㅋ 더불어 {이번엔 다르다}에 대한 저자 자신의 간략한 설명도 얻을 수 있다. 이 책에 대해서는 {프레시안}에 실린 조원희 교수의 서평도 볼만하다(링크).

으아… 일단 이 정도로 해 두자. 씨리즈가 언제까지 계속될 지는 모르겠지만, 필요하면 앞으로 한두번 더 포스팅해보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만으로도 대충 ‘음.. 이렇게 돌아가고 있군’이라는 감은 잡으셨을 줄로 안다.

그러니까 결론은 (버킹검!-_-) 재정절벽이니 뭐니 하는 것은 모두 ‘dog sound’라는 것. 물론 이상의 논의가 노동자계급에게 함의하는 바는? 이라는 매우 심오한 물음을 가지신 분들께는 별 도움을 드리진 못할 것. 그에 대해선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앞으로 머리를 맞대봐야 할 것이다. (끝)

[잡생각] 크루그먼, 맨큐, 월가시위, “진짜 경제학자 구함”

간만에 블로깅. 약간 묵혀뒀던 것으로. . .

요새 “점령하라(occupy)” 운동으로 말이 많다. 우리나라에선 처참하게 끝난 것 같지만, 미국에선 그 파급력이 엄청나, 하버드에선 수업거부 사태까지 빚어졌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니, 한국에서도 다시 한 번 불길이 타오르길 기대할 수도 있겠다.

 

— 한때 “20:80 사회”라는 표현이 유행하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그런 표현이 현실을 과장한다며 이를 기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점령하라” 운동의 모토는 “우리는 99%다”이니, 이것도 뭐든 극단적으로 만들어버리는 신자유주의가 빚어낸 촌극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경제적 위계의 최상위에 있는 1%를 규탄하는 현재의 운동은 과녁을 제대로 잡은 것일까? 미디어를 통해 많은 논란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다소 뒷북이긴 하지만, 미국의 의회예산국(Congressional Budget Office)이 최근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위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 같다.

1979~2007년 사이 세후 실질소득의 증가

{1979~2007년 가계소득분포의 추이}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의 핵심은 위 그림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지난 약 30년간 소득수준으로 봤을 때 하위 20%의 실질소득증가는 약 20%에 지나지 않는 반면, 이 비율은 소득분위가 20%씩 올라갈수록 커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상위 1%의 소득증가는 무려 300%에 육박하고 있다. 절대적 관점에서 보면 “빈익빈”은 아니더라도 이는 분명 “부익부”이며, 또한 “부익부”이므로 적어도 상대적으로는 “빈익빈”이다. 다음 그림은 또 어떤가.

소득집단별 세후총소득의 몫

이 그림은 위에서 말한 “절대적 부익부”와 동반된 “상대적 빈익빈” 현상을 매우 잘 보여주고 있다. 즉 전체 국민소득에서 하위 20%와 상위1%가 차지하는 몫이 1979년엔 거의 비슷했는데, 2007년에 이르면 전자의 몫은 과거에 비해 다소 줄어든 반면 후자의 몫은 2배 이상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더욱 재밌는 사실은 상위 20% 중 최상위 1%를 제외한 19%와 나머지 1%를 비교했을 때 나타난다. 즉 전자의 소득몫은 35%대에서 정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는, “20:80 사회”보다는 “1:99 사회”가 오늘날 (적어도 미국의) 현실을 더 잘 묘사한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도 있단 얘기다.

그렇다면 이는 오늘날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시위의 정당성을 말해주는 것인가? 일단은 여기에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어떤 의미에선 “1%”라는 것도 지나치게 크게 잡은 수치라 볼 수도 있다. 이에 관해선 약 1주일 전에 Paul Krugman 교수가 쓴 블로그 글을 참조할 수 있겠다. 위에서 내가 언급한 것과 같은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그는 몇 년 전에 같은 기관에서 나온 비슷한 성격의 보고서를 함께 상기시키고 있다. 다음 그림을 보라.

요 전의 것과 비슷한 그림인데, 여기서는 상위 1%를 좀 더 세분해서 최상위 0.1%와 그 아래 0.9%의 소득몫을 비교하고 있다. 놀랍게도 전자의 소득몫이 1979년부터 2005년까지 약 사반세기 사이에 엄청나게 증가해, 2005년에 이르면 이들의 소득이 역시 부의 위계에서 최고층을 이루지만 이들보다 약간 낮은 곳에 속한, 그러나 수적으로는 9배에 달하는 사람들이 가진 소득에 맞먹는다는 얘기다! 이런 그림을 보여주면서 크루그만 교수는 미국은 바로 그 0.1%의 사람들에 의해 움직이는 “과두제” 사회라고 결론짓고 있다. 당연히 틀린 얘긴 아니다.

 

— 크루그만, 하여튼 재밌는 사람이다. :) 그런데 그의 위 글을 두고 하버드의 맨큐(N. Gregory Mankiw) 교수가 간략한 코멘트를 붙였다. 긴 얘기 할 것 없이, 솔직히 참으로 머리에 뭐가 들었나 하는 생각밖에 안 든다. 저게 하버드 교수면, 나는. . . ㅎㅎ

애초 크루그만 얘기는, 교육을 더 받으면 소득이 높아진다는 얘기가 있는데 실제 현실을 보면 교육과 상관없이 미국에서 가장 잘 사는 사람은 매우 소수의 “과두들”이라는 것이었다(물론 이 “과두들”이 교육을 상대적으로 잘받았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맨큐는 이런 주장이 터무니없다면서, 크루그만이 교육의 효과를 잘못 제시하고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즉 교육의 효과란 “1년 더 교육받으면 소득이 10% 높아진다”라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며, 그 효과는 확률적으로 분포할 것이므로 몇 년간의 대학교육은 어떤 이에겐 10% 정도의 소박한 소득증가를 가져오겠지만 다른 어떤 이에겐 1,000%라는 짜릿한 소득증가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식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교육은 소득이 높아질 수 있는 가능성을, 즉 어떤 사람의 소득을 최상위 1%에 속하게 만들어줄 가능성을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는 얘기다.

과연 웃기지 아니한가?!! 이로써 하버드 대학교 경제학과의 대표적인 교수이자, 부시행정부시절 대통령 경제자문위 위원장이었으며, 전세계적으로 가장 인기있는 경제학 교과서 {경제학 원리}의 저자인 저 위대한 맨큐 교수께서, “대학교육을 받으면 여러분들은 소득수준 최상위 1%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 셈이다. 세상에. . . 이 정도면 몇몇 학생들이 맨큐 수업을 거부할 만도 하지 않은가?!! 아니, 아예, 대학을 거부해야 할 상황이다. . .

 

— 말이 나왔으니… 수업거부 얘기도 재밌다. 한쪽에선 수업거부를 하고, 다른 한쪽에선 수업사수를 하고… 일단 이런 모습. . . 어린 학생들이 나름 치열하게 자기들 주장을 공개적으로 내놓으며 서로 자웅을 겨루는 것은, 뭐 나쁘진 않다. 그런데 맨큐 교수에 따르면 5~10%의 학생들만이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다는데… 이건 좀 실망스럽다. 물론 실제 수강을 하지 않는 학생들이 자리를 채우기도 했겠지만, 어쨌든 5~10%의 결석률이 수업거부라면, 나는 매번 수업거부를 당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 울적하기도 하고.. ㅎㅎ

어쨌든 수업거부를 하는 학생들을 비난하는 이들의 논리는 크게 두 가지인 것 같다. 첫째는 어차피 “1%”에 속할 가능성이 많은 하버드 녀석들이 “나는 99%다”라고 떠드는 게 영 못마땅스럽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업거부하는 애들은 공부 잘 못하는 애들, 즉 맨큐의 강의나 교과서를 비판할 능력과 자질이 없다는 것이다. 뭐… 기본적으로 둘 다 타당한 면이 없진 않다. 특히 후자에 관해선, 이를테면 이번에 실제로 수업거부하는 친구들이 그러듯이 “맨큐의 강의는 편향되어 있다. 이는 그가 부시행정부 시절에 맡았던 역할과도 관계 있다”라는 식으로 비판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만약 “비판”이 이 정도라면, 맨큐로서도 할 말이 매우 많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비판해야 하느냐?! 마침 최근에 내가 쓴 글도 있고 하니, 이 점에 대해 더 얘기할 필요는 없겠다.

 

— 하지만 수업거부하는 하버드 경제학과 학생들에 대한 “수업도 제대로 안 들은 녀석들이…”라는 비판을, “점령하라”에 (몸으로든 마음으로든) 참여하는 대중들을 향해서도 퍼붓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실제로 이런 비판은 다양한 형태를 띤다. “아이폰만 좋아했지 애플 주가도 모르는 녀석들이…”, “대안도 없으면서…” 등등. 그러나 어차피 대중 차원의 현재와 같은 (상당 정도로 자생적인) 운동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딱히 뭔가를 “알아서” 거리에 나오는 것도 아니고, 무슨 거창한 “대안”이 있어서 현재의 status quo를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 촛불시위에 대해서도 비슷한 얘기들이 많았는데… 어떤 이들은 우리의 촛불시위나 현재의 월가시위를 보면서 “저항의 새로운 형태”라고 추켜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정반대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평가한다면,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 비로소 등장한 “저항의 새로운 형태”는, 오늘날 촛불시위/월가시위 등을 “새롭다”라고 하는 이들이 흔히 “낡은 형태의 저항”이라고 치부하곤 하는 바로 그 “고전적인” 저항, “노조나 정당 등을 통한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조직적인 저항”인 것이다! 반대로 오늘날의 촛불시위/월가시위 등은 그야말로 “낡은 형태의” 저항인데, 이에 대해선 E.P. Thompson 같은 양반이 잘 밝혀놓았던 것 같다.

마침 최근에 {뉴욕타임스}에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Roger E. Backhouse 대인께서 적절한 글을 쓰셨다(이 글을 내게 알려주신 NeoPool님께 감사를). 그는 월가시위에 나선 이들이 내놓는 질문들은 전적으로 정당하며, 만약 그것들이 다소 투박해 보인다면, 이를 세련되게 가다듬는 것은 경제학자들의 몫이라고 역설한다(그러고 보니 나도 예전에 비슷한 취지의 글을 하나 썼다). 그러나 그는, 현대 자본주의 경제의 심원한 모순들에 관한 그러한 문제들을 다룰 수 있을 정도의 깊이있고 폭넓은 시야를 갖춘 경제학자는 오늘날 보이지 않는다며 탄식한다. 적어도 맨큐와 같은 이들이 오늘날의 경제학자를 대표하는 한 사람이라면, 백하우스의 탄식은 분명 “이유 있다”고 하겠다. (끝)

《이코노미스트》가 ‘경제학 제국주의’에 반대를?

만약 《The Economist》가 ‘경제학 제국주의'(economics imperialism, 지금부터는 EI)에 반대한다면, 그건 아주 놀라운 일일 것이다. EI란, 마치 현실의 제국주의에서처럼, 경제학이 그 특유의 방법론을 가지고 여타의 사회과학 분야들의 고유의 영역들을 침범하는 것을 말한다.

아래 글은, 요즘 《The Economist》에서 야심차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운영중인 블로그 중 하나에서 옮겨온 것이다(링크).

But I do think that this argument points to an overarching cultural trend, namely an increasing tendency to use the language of economics when talking about any social or political issue whatsoever [인용자: 이게 바로 ‘경제학 제국주의’다]. Over the past 15 years, a number of gifted popularisers of economics have helped show laymen how to think about a lot of disparate subjects using economic tools and styles of thought. Paul Krugman was among the first of these; he has been followed by Stephen Levitt, Charles Wheelan, Tim Harford, and many others. But it seems that when Mr Krugman started writing columns suggesting how to look at political and social issues from an economist’s perspective, he didn’t anticipate that people might decide that economic language and styles of thought are always the best way to think about everything.

와우… 재밌다. 여러모로.

첫째로, 위 구절에서 ‘EI’가 매우 제한적으로만 의미있음을 인정하고 있다는 게 재밌다. 이는 매우 쉽게 EI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둘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구절이 EI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다는 것도 재밌다. 저자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바로 그는… EI를 일반화한 ‘주범’ 중 하나인 폴 크루그만(Paul Krugman)의 (매우 애매모호한) ‘진심’을 언급함으로써. 즉 PK의 진심은 그게 아니었는데, 뭣도 모르는 ‘애들’이 PK를 어설프게 따라하다가 이른바 ‘EI’라는 해괴한 습관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위 블로그 포스트를 쓴 기자가 PK 말고 다른 저자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할지도 매우 궁금하다. 위에서 언급되고 있는 스티븐 레빗, 팀 하포드, 찰스 휠란 등은,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인기있는 경제학 저자들로, 각각 『괴짜경제학』 씨리즈, 『경제학 콘서트』 씨리즈, 『벌거벗은 경제학』 등을 냈다.

셋째로, EI에 대한 ‘비판’이 《The Economist》에 의해 위와 같이 비록 ‘제한적으로나마’ 나올 수 있다는 것도, 결국은 2007/08년 이후의 범세계적 위기의 결과일 것이라는 점도 재밌다.

원래 위 글은… “환자들은 소비자가 아니다”라는 크루그만의 4월21일자 칼럼에서 비롯된다(링크). 잘 알려져있다시피 크루그만은 미국 의료보험개혁에 매우 헌신적인 경제학자다. 이에 대해 앞서 인용한 《The Economist》 블로그의 한 저자가 논평을 했고(링크), 역시 같은 블로그의 다른 저자가 반론(위 인용부분이 속한 포스트)을 펴는 식으로 논의가 전개되었다. 심심하신 분들은 처음부터 한번 쭈욱 훑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참고로, 나도 예전에 이 블로그에 경제학 제국주의를 비판하면서, 『괴짜경제학』을 언급한 바 있다(링크1, 링크2).

[200908] 경제학이 나아갈 길

내친김에… 앞서 글과 같은 매체에 실렸던 글 하나 더. 2009년 8월에 썼다. 아래 글에서 묘사된 <이코노미스트> 지상의 논쟁이 문득 떠오른다. 상당히 치열했고, 그런 점에서 우리가 본받을 만한 것이었다.

글의 말미에 ‘국가의 역할’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적어도 이때만 해도 여러 논쟁들 중에서 국가의 역할과 위상이 과감하게 인정되는 분위기였는데, 최근들어 많이 바뀌고 있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2008년 9월 이후 엄청난 액수의 돈(물론 그 돈은 모두 국민의 세금에서 조달되는 것으로 보면 된다)이 망가진 금융시스템의 구출에 쓰였고, 또 이를 위한 ‘정당성’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금융시스템은 국가의 일부다'(당시 영국 총리였던 고든 브라운의 말)라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보라. 이를테면 최근 우리나라에 와서 논쟁을 벌이기도 했던 크루그만(Paul Krugman)과 나이올 퍼거슨(Niall Ferguson)을 보라. 크루그만이 대체로 케인스주의에 입각해서 국가의 역할을 과감히 인정하고 있는 반면, 퍼거슨은 (속류) 고전파적인 입장–이는 곧 케인스의 정의에 따른 고전파를 의미한다–에서 거의 ‘야경국가론’에 다름 아닌 논조를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크루그만과 퍼거슨의 논쟁은 2008년 4월부터 시작되었는데, 논쟁 초기엔 퍼거슨도 국가의 역할에 심각하게 의문을 달지는 않았었다. 그의 입장은 시간이 가면서 묘하게 바뀌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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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이 나아갈 길

1. 최근 <이코노미스트>가 현재의 범지구적 경제위기와 관련, 경제학을 본격적으로 문제삼고 나섰다. 이 주간지는 7월 18일자에서 “경제거품 중에서 경제학의 명성에 낀 거품만큼 장관을 연출하며 터진 것도 없을 것이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일련의 논쟁적인 기사들을 무려 6면 이상에 걸쳐 냈다.

흔히 경제학자를 “세속의(worldly) 철학자”라고 하는데, 이를 비꼰 게 분명한 “다른 세상의(other-worldly) 철학자들”이라는 한 기사의 제목이 보여주듯, 이번 비판은 경제학의 비현실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재밌는 것은 이 기사들이 경제학자들을 “수학적 모형화”와 “효율시장가설”의 맹신자로 묘사하면서, 그런 경향에 반대하는 크루그만(Paul Krugman)이나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 같은 또 다른 경제학자들의 견해에 크게 기대고 있다는 점이다.

이 기사들은 곧바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이 잡지는 3주 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루카스(Robert Lucas) 시카고대 교수의 반론기사를 이례적으로 한 면 가득 내보내기에 이르렀다. 동시에 같은 호의 “독자편지”란은 3주 전의 기사들과 관련된 의견들로만 채워졌다.

2. 현대경제학의 발상지답다고 해야 할까? 꼭 <이코노미스트>가 아니라도, 영국 종이매체엔 경제학의 잘못을 꾸짖는 기사들이 연일 끊이지 않고 있다. 이때 매체들은 단순히 여러 의견들의 전달자에 그치는 게 아니라 각기 꽤 명확한 “입장”을 가지고 다양한 의견기사들을 통해 적극적으로 논의를 이끌고 있다. 특히 문제의 성격상 가장 활발하게 논쟁에 참여하면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코노미스트> 같은 경제지의 경우, 그 입장의 “배경”도 커다란 흥밋거리다.

<이코노미스트>는 자유무역 옹호, 보호주의 반대라는 기치를 내걸고 1843년에 창간됐다. 그 시작부터 “정치적”이었던 셈인데, 그 당시엔 대기근을 겪던 아일랜드에 식량원조를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정도로 자유방임 원칙에 충실했다. 1980년대엔 현재 신자유주의라 불리는 경제・정책이념의 화신인 레이건과 샛처 정부에 호의적이었다.

이와 같은 과거 행적을 놓고 볼 때, 앞서 소개한 <이코노미스트>의 경제학 비판은 언뜻 보면 그 기존입장에 배치되는 것 같다. 과연 이 잡지가 한때 자신이 옹호하던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비판하고, 케인스주의자이자 오바마 지지자이며 “복지국가의 수호자”를 자임하는 크루그만 같은 인물에 의존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좀 더 폭넓게 말하면, 현재 세계적으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는 전국민의료보험체계의 필요성을 대체로 인정하고 영국 국내정치에서는 보수당보다 노동당에 호의적인 모습을 종종 보이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러나 이런 입장은 2009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보수당 지지 쪽으로 급선회한다. 그리고 이런 입장변화를 주도한 것이 ‘황색언론’의 대명사 <더 선>(The Sun)이었다는 사실은, 그 입장 변화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것 같아 매우 흥미롭다.]

3. 그 해답은 궁극적으로는 20세기 말에 닥친 이데올로기의 혼란과 재편에서 찾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현실사회주의 붕괴는 기존의 좌파에 치명적인 타격을 날렸지만, 동시에 이 잡지가 떠받드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이념적·실천적 공간을 넓혀놓았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번 경제위기를 전후해 제기된 이슈들, 즉 몇몇 거대기업들의 국유화나 중앙은행의 역할, 경제학의 향후 재편방향 등을 둘러싸고 <이코노미스트>나 <파이낸셜 타임스>―소유구조로 보면 이 둘은 거의 하나나 다름없다―가 내놓는 의견이 전통적으로 노동당 성향인 <가디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는 것은,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조금 오래된 우스갯소리를 하나 하자면, 한 번은 <이코노미스트>가 당시 이탈리아 총리후보였던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를 무자격자라고 비판했다가 그로부터 “이코뮤니스트”(Ecommunist)라는 무시무시한(!) 별칭을 얻기도 했다.

4. 이런 사정을 두루 생각하면, 현재 <이코노미스트>가 제기하는 종류의 것이 경제학 자체에 대한 내재적이고 심도 있는 비판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하지만 학문이란 것도 결국엔 현실의 반영이고 그 다양한 이해관계들의 대립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니, 이는 한편 당연한 듯도 싶다.

그렇다면 역설적이게도, 경제학이 비현실적이라는 데서 출발했지만 결국 그것은 “세속의” 학문임을 보였다는 게 <이코노미스트>의 경제학 비판의 미덕이라고 해도 될까? 나아가 그것이 경제운영에서 국가의 역할을 크게 인정하고 있는 것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분위기를 계속해서 끌고가지 못한 것은 좌파들이 크게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끝)

Krugman, depression, 4대강 그리고, 세금을 거둬!

[글을 이동시켰더니 꼴이 말이 아니게 되어, 제목을 고쳐 다시 올린다.]

Recessions are common; depressions are rare. As far as I can tell, there were only two eras in economic history that were widely described as “depressions” at the time: the years of deflation and instability that followed the Panic of 1873 and the years of mass unemployment that followed the financial crisis of 1929-31. (Paul Krugman, “The Third Depression“, The New York Times, June 27, 2010.)

[번역] Recession은 흔하지만 Depression은 드믈다. 내가 아는 한, 경제사에서 그 당대에 “depression”이라고 널리 묘사되었던 시기는 딱 둘이 있다. 1873년의 Panic에 뒤이은 디플레이션/불안정의 시기와 1929-31년의 financial crisis에 뒤이은 대량실업의 시기가 그것이다.

크루그만이 현재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는, 범지구적 경기침체에 대한 대응방침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이 ‘대응방침’이란 한마디로 요약하면 ‘긴축(재정)’ 즉 ‘세금을 늘리고 정부지출을 줄인다’는 것이며, 크루그만은 이런 대응은 현재 어느정도 잦아든 위기에 다시 불을 붙일 뿐이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적극적이고 과감한 정부의 역할, 즉 ‘재정지출’이라는 거다.

뭐… 크루그만이 구체적인 방안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한, 큰 틀에서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가 자신의 그런 주장을 펼치기 위해 내놓는 근거, 특히 현재의 위기의 심각성을 강조하기 위해 내놓은 위 인용구절과 같은 근거에는 쉽게 동의할 수가 없다.

크루그만의 주장과는 달리, “그 당대에 ‘depression’이라고 … 묘사되었던 시기”는 그가 들고 있는 두 가지 예보다 더 많다(여기 등장하는 “널리”라는 부사는, 지식인들이 자신의 진술에 대한 ‘자신감 결여’를 숨기기 위해 종종 쓰는 표현으로, 실제로는 별 의미가 없다). 그는 recession과 depression을 구별하고 있는데, 실제로 recession이라는 표현은 오늘날 우리가 ‘대불황'(the Great Depression)이라고 부르는 시기 이후에 와서야–대체로 ‘대불황’과 같은 ‘엄청난’ 불황과 구별되는 ‘자잘한’ 불황을 일컫기 위해–널리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1930년대의 ‘대불황’ 이전에 ‘불황’ 즉 ‘depression’이라는 표현이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19세기 문헌을 보면panic이나 crash, crisis와 같은 표현들이 주로 쓰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다시, 크루그만의 주장과는 달리) 1819년 미국에서 벌어진 ‘Panic’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먼로(James Monroe)는 특이하게도 ‘depression’이라고 불렀다. 이런 사례가 말해주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자본주의 체제의 최고 위정자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가진 모순의 필연적인 표현인 panic/crash/crisis라는 현상을 인정하려고 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런 표현을 쓰는 것 자체도 꺼렸다는 것이다. 실은 바로 이것이 panic/crash/crisis 대신 depression이라는 다소 애매모호한 표현–미국의 경제통계국(NBER)도 이에 대한 명확한 규정을 내놓지 않고 있다–이 “널리” 쓰이게 된 중요한 배경이다. (아, 그렇다고 depression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건 아니고… 크루그만이 뭘 좀 모르고 말하고 있단 얘기다.) 다음 설명을 보라.

In the beginning stages of the Great Depression, Hoover remained in a state of denial over worsening economic conditions. Shortly following Black Tuesday, Hoover remarked that the “conditions are fundamentally sound.” Even as late as December 1930, Hoover maintained that “the fundamental strength of the economy is unimpaired.” It was not until 1931, when it became impossible to deny the economic train wreck transpiring, that Hoover began to refer to the economic situation of his own time as a “great depression.” (출처: When Did the Great Depression Receive Its Name? (And Who Named It?))

‘말’ 얘기는 이쯤에서 그치고… 다시 크루그만의 칼럼으로 돌아와보자. 칼럼을 다 읽기 어렵거나 귀찮은 분은 다음 기사들을 참조하시면 되겠다.

크루그먼 “제3의 불황은 이미 시작됐다” (<프레시안>, 2010년 6월 29일)
폴 크루그만 “긴축정책 때문에 ‘3차 불황’에 빠지고 있다” (<참세상>, 2010년 6월 29일)
(<참세상> 기사가 좀 더 충실하게 칼럼의 내용을 전하고 있지만 한 군데 오역이 있고, <프레시안> 기사는 좀 더 간결하고 정확하지만 몇 가지–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대목–빠진 내용이 있다.)

현재의 세계적 추세(긴축재정)와 이에 반대해 크루그만이 내놓는 처방(팽창재정)의 차이는 곧 문제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전자가 “재정건전성 회복”을 제1의 문제로 꼽고 있다면 전자는 “경제 전체의 활력 회복”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떤가? 4대강 사업이나 세종시 사업 등 “대규모 국책사업”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는 어쩌면 크루그만의 처방 쪽에 더 가까이 있는 것은 아닌가?

꼭 그렇지는 않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위와 같은 사업들은 (그 적절성에 대한 문제는 별도로 하고) 대체로 민간기업에 의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크루그만도 위 칼럼에서 시사하고 있듯이, 이런 대규모 사업의 직접적인 목표는 바로 “실업 해소”에 있다. 바로 실업자들을 대규모로 고용해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것이다(고용->소비->산출증대->투자…와 같은 선순환virtuous cycle의 회복). 이런 시각에서 보면,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세종시 수정안의 경우엔 국회표결에서 기각되었으므로 한동안 더 질질 끌리겠지만–대규모 사업들은, 그런 사업들이 당연히 목표로 해야 할 사항들과 별로 관계없이 진행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라.

낙동강 달성보 일부 공사중단 (<한겨레> 2010년 6월 27일)
4대강 상용직 고작 130개 (<한겨레> 2010년 6월 29일)

위 기사들이 지적하고 있는 현재 사태의 면면들을 보면, 4대강 사업이란 (환경에 대한 영향 같은 것은 관두고라도) 그것이 애초부터 겨냥하고 또 자랑해 왔던 “경제적 효과”를 달성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다시 <‘세계적 추세’ vs ‘크루그만 처방’>의 문제로 돌아가면… 비록 우리나라가 4대강 사업과 같은 것들을 추진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크루그만이 제안하는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론과 거리가 있음은 이미 지적한 바다. 그런데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는 데는, 우리나라 정부의 입장에서 봤을 때, 한편으로는 크루그만이 말하는 것과 같은 정부의 과감한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긴축’, ‘작은 정부’, ‘건전한 정부’를 추구해야 하는 절박함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즉… 침체해 있는 경기를 살리기 위해 뭔가 일을 벌이긴 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그것을 정부 돈으로 할 수는 없고… 정부는 그런 사업에 돈을 쓰기보다는 오히려 허리띠를 더 졸라매야 할 상황이고… 뭐 이런 거다.

미국이나 영국, 또는 현재의 그리스와 같이, 이번참에 크게 한방 얻어맞은 나라들은, 어쩌면, ‘긴축’과 ‘팽창’ 사이에서 (큰 틀에서)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실제로 이를테면 영국의 경우엔, 이번 총선에서 드러났듯이, ‘긴축’ 쪽으로 완전히 기조를 잡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니, 적어도 우리나라 ‘정부’는, 아직 쓴맛을 덜봐서 그런지, ‘세계적 추세’대로 긴축재정을 펼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크루그만 처방’대로 정부의 과감한 역할론도 옹호하고 있는 셈이다. 말하자면… 서로 다른 방향을 뛰어 도망가고 있는 ‘두 마리 토끼'(경기부활+재정건전성 강화)를 한꺼번에 잡겠다는 속셈인데… 위 기사들에서 보듯이, 이미 그런 전략–아니, 그런 ‘방침’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현재 정부가 택하고 있는 ‘방식’의 ‘구태의연함’이 문제일 거다–은 곳곳에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더구나 재정 건전성 문제는, 아직은 우리나라에서 심각하게 떠오르고 있지는 않지만, 이는 경제 전체의 다양한 측면에서의 취약성과 더불어 두고두고 문제가 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크게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게 있다. ‘긴축’을 택하든 ‘팽창’을 택하든, 또는 ‘세계적 추세’를 따르든 ‘크루그만 처방’에 모험을 걸든, 어떤 경우에도 공통적으로 전제되어야 하는 조건이 있다. 바로 ‘증세’다. 우리나라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실업자는 늘어나고, (그에 따라) 경기는 침체해 있고, (그나마 믿고 있던) 부동산도 안 되고, 중앙 및 지방의 정부재정은 날이 갈수록 취약해지는데… 이 거지 같은 정부는, 세금을 더 걷을 생각을 안 하는 것이다… 어렵게 볼 것 없다. 부자에게서 세금을 거둬들이란 말이다… 이 씨방새들아…

전세계 ‘부자 증세’ 기조 속 한국만 ‘부자 감세’ 고집하면… (<경향신문>, 2010년 6월 29일)
외국선 부자 증세, 한국은 감세 (<경향신문>, 2010년 6월 29일)

♨♨♨ “부자에게서 세금을 거둬들여라”… 좋은 말이다. 이 좋은 말이 노래에 들어가 있으면 더 좋다. 그런 노래가 있다. Ten Years After의 “I’d Love to Change the World”다. 영화 <중앙역>에 삽입되어 한동안 때늦은 인기를 끌기도 했다.

글을 쓰고 보니 문득 이 노래가 생각나 붙여둔다. “Tax the rich / Feed the poor / Till there are no rich, no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