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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 단순하고도 복잡한 것

이론이란 단순한 것이기도 하고 복잡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현실과의 관계에서 보면 단순할 수밖에 없다. 이론이란 현실에 대한 이론가의 지적 개입의 산물로, 거기에선 현실에 대한 일정한 추상화와 단순화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론의 추상성/단순성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며, 이론에 필연적으로 따라붙은 ‘원죄’와도 같은 것이다.

다른한편, 당분간 이론 그 자체의 영역이 있다고 해보자. 여기에서 이론은, 그러니까 ‘좋은’ 이론은 복잡해야만 한다. 즉 그것은 ‘진짜 현실’과 같은 복잡한 구조를, 그러나 ‘진짜 현실’과는 달리 (왜냐하면 이론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현실의 ‘지적 재구성’이므로) 체계적인 구조를 갖지 않을 수 없다. 마르크스가 {요강} 등에서 ‘현실/역사의 순서’와 ‘구조/논리의 순서’를 구별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이러한 복잡성을 갖지 못하는 이론은 필연적으로 ‘환원론’이 될 수밖에 없다. 즉 자신의 단순함 속으로 현실을 끌어들이려 하는 것이다. 반대로 복잡한 이론은 현실의 복잡성을 반영하면서 끊임없이 거기에 개입함으로써 끊임없이 발전한다. 그래서 단순하고 환원론적인 이론은 언제나 자신의 완결성을 주장하지만, 복잡하고 체계적인 이론은 언제나 자신의 부족함을 탓한다. 바로 이 부족함의 자기인식이야말로, 이론의 내적 발전을 추동하는 원동력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이라는 괴물 저작을 거의 완성해놓고도 그 출판을 미룬채, 그리고 죽음의 위협과 사투하면서까지도 자본주의의 작동과 변모에서 주의를 떼지 않은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통상적인 부르주아 이론(경제학을 포함해)이 전자와 같은 환원론인 반면, 마르크스의 이론은 바로 이런 후자에 속하는 이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이론에 대해 그것이 환원론(경제로의 환원론, 생산중심주의 등)이라고 비판하는 이들은, 이론의 위와 같은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사회, 공황, 경제학: 마르크스가 리카도에 가한 하나의 비판

오늘날까지도 경제학자들은 공황을 부정한다. 그들은 심지어, ‘공황’이라는 말 자체를 일부러 안 쓰려고 안간힘을 쓰기까지 했다. 이에 대해선 이 블로그에서 한번 지적한 바 있다(링크).

하지만 눈을 가린다고 어지러운 광경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말’을 없앤다고 그 말이 가리키는 ‘현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제학자들이 그러듯, 어떤 사태를 미봉적으로 부정하려 하면 할 수록 그 사태는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법이다. 그러다가 어떤 국면에 이르면, 누구도 그 사태를 부정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위기도 마찬가지다. 이에 대해 일전에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실제로 세계경제는 적어도 최근 40여 년만 놓고 봐도 끊임없이 공황에 시달려왔지만, 그때마다 이 공황들은 때로는 중동 산유국들의 자원이기주의의 탓으로, 때로는 중남미 포퓰리즘적 정부들의 방만한 재정운영이나 동(남)아시아 나라들의 유교적 잔재의 탓으로 얼버무려지곤 했다. 그러나 세계자본주의의 핵심부에서, 그것도 현대 경제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금융분야에서 불거진 이번 공황은 마르크스 따위엔 관심도 없던 대중들에게조차 체제 자체의 문제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출처)

그런데 돌이켜보면, 위와 같은 태도, 그러니까 자본주의 경제의 내재적 모순에서 유래하는 공황을, 즉 한편으로는 공황의 이와 같은 본질적 성격을, (그리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공황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에겐 꽤 오래된 습관이다. 다음 구절을 보라.

리카도는 공황에 대해, 즉 생산과정 그 자체로부터 발생하는 세계시장의 일반적 공황에 대해 실제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는 1800년에서 1815년 사이에 벌어진 공황들을, [나폴레옹의] 대륙봉쇄의 결과 시장이 경제적이 아닌 정치적인 이유로 억지로 축소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흉작 때문에 일어났다고, 지폐의 감가, 식민지 작물의 감가 등에 의해 일어났다고 설명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1815년 이후의 공황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일부는 흉작 때문에, 그리고 일부는 곡물가격 하락 때문에 벌어졌다고 설명할 수 있었다. 그 자신의 이론에 따르면 잉글랜드가 유럽대륙으로부터 격리되었던 전쟁 동안에 곡물가격에 상승압력을 가했던 앞서의 원인들은 작동을 멈추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기의 공황들은 부분적으로는 전쟁으로부터 평화로의 이행이 ‘무역 채널의 갑작스런 변경’을 가져와서 빚어졌다고 설명되기도 했다. 이후에 벌어진 역사적 현상들, 특히 세계시장에서 거의 정기적인 주기를 가지고 일어나는 공황들은, 더이상 리카도의 후계자들로 하여금 사실을 부정하거나 이를 우연에 돌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 . .] (강조는 EM의 것. 출처: Karl Marx Frederick Engels Collected Works, Vol. 32, pp. 128-29)

그렇다면, 이후 경제학자들이 공황의 주기성, 그것의 본성을 인정하게 되었는가? 마르크스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이를테면 ‘자본의 과다'(plethora of capital)와 ‘과잉생산'(overproduction)의 구별(이 사항들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생략)을 도입함으로써, 교묘히 본질적인 물음을 회피해갔다.

이상으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과거 리카도주의 경제학자들이 그랬듯, 오늘날의 경제학자들도 공황의 본질, 자본주의 경제의 모순적 성격을 인정하는 척, 그럴싸한 제스처를 취하다가 끝내는 자신들의 기존 입장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말 것이라는 점. (이런 경제학의 성격을 가리켜 Ben Fine은 ‘낡은 경제학 제국주의에서 새로운 경제학 제국주의로의 이행’이라는 표현을 썼다.)

2. 마르크스가 리카도에 대해, 그가 불충분하게나마 19세기 초의 공황들은 설명할 수 있었음을 인정했다는 것이 매우 시사적이다. 이것은, 크게 보면 마르크스(와 그의 훌륭한 선배였던 아담 스미스나 헤겔)이 파악하고 있던 근대사회의 본질, 좀 더 직접적으로는 정치경제학의 본질적 성격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곧 근대사회란 그 물질적 차원의 운동이 정치나 자연과 같은 경제외적 요인들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 그 자체의 내재적인 법칙에 의해 규제되는 사회라는 것, 그리고 정치경제학이란 바로 그러한 경제법칙, 따라서 경제법칙에 의해 규제되는 근대사회의 물적 동향에 대한 학문이라는 것! 이런 생각에 따른다면, 정의상 경제학은 (경제외적 강제에 의해 물적 차원의 운동이 결정적으로 규정되는) 봉건제 사회에 있어서는 온전하게 성립할 수 없다.

정치경제학? or 경제학? – 다시 한 번 ‘꼼수’에 대하여

경향신문이 사정이 진짜 어렵긴 어려운가보다. 이런 글까지 다 실어주니까 말이다.

[경제와 세상] ‘경제학’ 용어에 숨겨진 꼼수 (강신준, 2012년 2월 15일)

1. 이 글은 단순한 ‘무개념’뿐 아니라 경제학 교수가 범했다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사실관계상의 오류’로 점철되어 있다. 몇 가지 간단히 지적하겠다.

우선 사실관계를 얘기하자면 후자의 용어[economics]는 알프레드 마셜이란 사람이 1890년에 임의로 만들어낸 것이다.

여기서 ‘사실관계’라는 표현은 지나치게 대담한 것이다. 이유는 두 가지. 첫째,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종류의 용어변천은 누구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할 수 없는, 어떤 집단적인 과정의 결과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예컨대 ‘economics라는 표현을 저서의 제목에 처음 쓴 사람은 xxx이다’라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강교수와 같이 ‘xxx가 만들었다’라고 하긴 매우 어렵다. 일반적으로 그렇단 얘기다.

하지만 두 번째 이유가 더 심각하다. 왜냐하면 어떤 기준으로 보든 위 진술은 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샬의 1890년 저작이란 말할 것도 없이 그의 {Principles of Economics}일 것이다. 분명 이 책에 ‘economics’라는 표현이 나오고, 또 이 책이 ‘political economy’가 ‘economics’로 대체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지만, 불행히도 그것을 ‘만들어낸’ 것은 마샬도 아니고, 또 그의 저 1890년 저작에서 그 용어가 처음 쓰인 것도 아니다. 일단 ‘economics’라는 용어는 다름아닌 마샬 자신이 그의 부인과 함께 쓴 이전 저작 {The Economics of Industry}(1879)에도 쓰인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economics’가 출현한 첫 사례는 아니다. 그 전에 이미 1877년, 1878년에 각각 J. M. Sturtevant 및 H. D. Macleod의 저작의 제목으로 쓰인 바 있다. 특히 Macleod는 이에 앞서 1875년에 발표된 한 논문에서 ‘political economy’를 ‘economics’라고 바꿔부를 것을 제안하면서, economics를 “교환가능한 양들 간의 관계를 지배하는 법칙들을 다루는 과학”이라고 규정하기까지 했다.

(사실 이에 대해선 이미 나 자신이 몇 번 밝혔다. 나는 심지어 강교수가 그에 대해 무려 ‘반론’을 내놓기까지 한 글에서도 이에 대해 언급하면서, 내가 아는 한 현재 우리나라에 나와있는 관련논문 중 가장 훌륭한 이헌창 교수의 글을 소개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강교수께서 위와 같은 오류를 견지하고 계신다니..)

 

2. 다음으로, ‘정치경제학’과 ‘경제학’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자. 둘은 같은 것도 아니고, 둘의 차이는 단순히 앞에 ‘정치’가 붙었는가 아닌가의 문제로 환원될 수도 없다. 강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제학과 정치경제학을 구별하는 것은 ‘꼼수’를 진실과 혼동하게 만드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두 경제학은 서로 독립적인 별개의 과학이 아니라 단지 ‘진실’과 ‘꼼수’의 차이일 뿐인데 이를 서로 달리 부르는 것은 곧 ‘꼼수’의 의도처럼 진실을 외면하게 만드는 일이 아닐까? [. . .] 두 경제학은 서로 다른 것인가?

기본적으로 나는 위 말이 무슨 뜻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전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 “‘진실’과 ‘꼼수’를 달리 부르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걸까? 전혀 설득력이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의 아량을 발휘해 그의 의도를 읽어보면, 대충… [‘political economy’와 ‘economics’가 서로 다른 것도 아니고, 나아가 ‘경제학'(=economics)이라는 용어는 마샬을 위시한 경제학자들의 ‘꼼수’의 산물이므로, ‘진실’을 수호하는 우리가 굳이 물러서서 ‘정치경제학’이라는 불편한 용어를 쓸 까닭이 없다]라는 것 같다.

그런데 강교수가 말하는 것과 달리, ‘political economy’와 ‘economics’는 단순히 앞에 형용사 하나가 더 붙었느냐의 차이로 환원될 수 없다. 전자가 후자로 바뀌면서, 이름만 바뀌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보일 것이다. ‘political economy’에서 ‘economics’로의 변화는, 단순히 이름에 대한 게 아니며, 이 과정에서 ‘economics’는 기존의 ‘political economy’에 대해 그 대상과 거기에 접근하는 방법론 자체를 차별화함으로써 자신을 부각시켰다. 물론 이 과정은 누구 한 사람에 의해 이뤄진 게 아니고, 꽤 오랜 기간에 걸쳐 그리고 개개인의 의지와는 어느 정도 별도로 이뤄졌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모든 얘기를 풀어낼 수는 없고, 관심 있으신 분들은 이 블로그에 있는 나의 글(‘IIPPE: 경제학을 넘어 사회과학의 재편으로‘, 특히 두 번째 글)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다행히도 강교수도 둘의 차이가 단순히 이름의 문제라고 보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그는 이 대목에서 ‘꼼수’ 드립을 치고 있다. 세상에! 그러니까 강교수에 따르면, 마샬은 뻔뻔스러운 ‘꼼수쟁이’가 된 것인데… 세상에… 왜곡도 이런 왜곡이 없다. 두 가지를 간단히 언급만 하겠다. 첫째, 마샬은 (마르크스 식으로 말하면) 그 부르주아적 한계 안에 갇혀있긴 해도 그 나름대로 노동이나 산업의 다양한 문제들을 두루 시야에 넣으려고 노력했던 인물이다. 둘째, 마샬 부부가 그들의 1879년 저작에서 말하듯(p. 2), 그들이 ‘political’을 뺀 데는 그 용어의 의미가 과거와 크게 변화했다는 사정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정치경제학’이라고 했을 때, 이는 ‘정치적인 경제학’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경제학’ 또는 ‘사회경제학’이라고 해야 원래의 ‘political economy’와 의미상으로는 통하는 게 된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교수는 아마도 그 자신은 의식도 하지 못한 채 하나의 중요한 ‘진실’을 말하고 있다. 즉 그는 스미스와 마르크스를 비롯한 이들이 했던 연구, 즉 ‘political economy’를 ‘경제학’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실제로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경제학’은 원래 ‘political economy’의 역어였던 것이다.

이헌창 교수가 밝혀주는 바에 따르면, 19세기 중엽 서양의 ‘political economy’가 번역될 때 ‘경제학’이 선택되었고, 이에 대응해 이후의 ‘economics’에 대해서는 한때 ‘이재학’과 같은 역어가 부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여곡절끝에, 서양에서 ‘political economy’가 ‘economics’에 압도되는 것에 발맞춰, 점차 ‘economics’도 ‘경제학’으로 일괄 번역되게 된 것이고, 결과적으로 ‘political economy’는 ‘정치경제학’이라는 다소 괴상한(?) 이름으로 번역되게 된 것이다. 주객전도라는 말이 제격인 상황이다.

 

4.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몇몇 학자들이 굳이 ‘political economy’라는 용어를 살려쓰고, 또 (비록 좀 껄끄럽기는 해도) ‘정치경제학’이라는 단어를 고집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그러한 이름으로, 오늘날 그야말로 막나가고 있는 ‘경제학’을 견제하고 나아가 비판적 사회과학의 전통을 다시 세우기 위함이다.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경제학은 상당히 ‘political’해지고 있다. 원래 마샬 등이 ‘political economy’였던 것을 ‘economics’로 바꾸고자 했던 데는, ‘경제학’이라는 것을 매우 좁게 설정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순수경제학’인 것이다. 이로써 기존의 ‘political economy’는 순수이론과 각종 응용분야들로 나뉘게 되는데, 말하자면 과거에 ‘political economy’가 관심을 두고 있었던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이를테면 J. S. Mill 같은 이가 열정적으로 다뤘던 분배의 문제)은 ‘순수이론’이 아닌 ‘응용’분야로 밀려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경제학이 최소한으로 정의되자마자(‘제약 하에서의 선택에 관한 과학’이라는 식으로),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일반화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인간사에서 ‘제약 하에서의 선택’이 아닌 것이 무엇인가)! 이리하여 경제학은 그것이 마샬 등에 의해 제안된 ‘협소한 한계’를 넘어, 그리고 과거 ‘political economy’ 시절에 그것을 규정했던 한계도 훌~~쩍 넘어, 경제학이라는 틀로는 쉽게 다룰 수 없는 여타 사회과학들의 영역을 마구 짓밟고 있는 것이다. 이를 일컬어 ‘경제학 제국주의’라고 한다(관련글).

요컨대 오늘날, 영어로 치면 ‘political economy’, 우리말로는 ‘정치경제학’이라는 표제로 우리가 꾀하는 것은, 위와 같은 막나가는 경제학(economics)을 비판하기 위함이다. 그럼으로써, 경제학 내부로 치면 ‘economics’가 ‘political economy’였던 시절에 가졌던 사회적(the social)이고 물질적(the material)인 관심(바로 이 블로그의 이름이다!)을 복원하고, 나아가 그러한 ‘political economy’라는 관점을 다른 사회과학 분과들과 한편으론 공유함으로써 또 다른 한편으론 ‘정치경제학’을 그것이 미처 담아내지 못하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삶의 단면들에 관한 여타 사회과학 분과들의 성과들과 결합함으로써 ‘비판적 사회과학’의 전통을 새롭게 확립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의 목표다.

 

5. 사태가 이러하기에, 사실 마르크스의 주저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를 ‘자본’이라고 할 거냐 ‘자본론’이라고 할 거냐, ‘경제학비판’이라고 할 거냐 ‘정치경제학비판’이라고 할 거냐 등등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이상에서 지적한 사항을 생각하면, 위 문제, 적어도 ‘정치경제학’이냐 ‘경제학’이냐라는 문제는 중요하기도 한데, 지금까지 대충 밝혀졌듯이, 강교수는 이것이 ‘왜!!’ 중요한지조차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오히려 그는 사태를 ‘꼼수’라는 지극히 애매모호한 ‘말’로 뭉뚱그리고 있다. 이 대목에서, 괴테를 차용한 마르크스의 저 구절, ‘개념이 빠진 곳에는 말이 들어선다’라는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꼼수에 대해서 내가 일전에 주장했듯이(‘나꼼수와 마르크스‘), 사태를 (가카의, 또는 경제학자들의) ‘꼼수’라는 식으로 파악하는 것만큼 단순하고도 그릇된 것도 없다.

마르크스는 그 이전 및 당대의 ‘정치경제학’을 ‘비판’할 목적으로 그의 주저를 썼다. 강교수는 바로 그 저작, 그것도 독일어 원저작의 한국 최초의 완역자다. 바로 그런 분께서 꼼수 운운하는 것이 딱하고, 그분이 번역한 것을 읽게될 선량한 독자들이 딱하다. 그가 보이는 것과 같은 인식으로 (마르크스가 겨냥했던) ‘경제학 비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성희롱 발언이나 일삼는 나꼼수 4인방이 비열한 착취를 철폐하고 새세상을 열 거라고 생각하는 거랑 뭐가 다른가 모르겠다. (끝)

 

게슴츠레님 또는 고진 또는 《진보평론》에 대한 잡담: 결국은 “《자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진보평론》의 이번 겨울호에 실렸다는 글을 하나 봤다. 그런데 저자가 좀 낯이 익다. 과거 내 불로그에 종종 덧글을 남겨주셨던 게슴츠레님이었던 것. 그의 (새로운) 블로그를 통해 글을 읽게 되었다.


이지원, 〈가라타니 고진의 『자본』 읽기: 가치형태론을 중심으로〉, 《진보평론》 제42호, 2009년 겨울.

이 글을 통해 알게된 첫 번째 것은 물론(!) 게슴츠레님의 실명과 소속이었는데, 짐작은 어느정도 하고 있었지만 그는 대학 학부생이었다. 뭣보다 글을 읽기도 전부터 나는, 학부생이 《진보평론》의 “일반논문” 코너에 실릴 정도의 글을 썼다는 점에 놀랐고, 또 (난 그 시절에 뭐했나.. 하는 생각에) 속으로 뜨끔하기도 했다. ㅎㅎ

실제로 그의 글을 읽으면서, 이 뜨끔함도 커졌다. 글도 꽤 잘 씌었고, 뭣보다 (으레 “일반논문” 같은 코너에 실리는 글들에 걸맞게) “길었다”! 이건 결코 폄하나 빈정거림이 아니다. 순전한 칭찬이자 부러움의 표현이다. 지금이야 뭐, 글 길게쓰기 선수라고 해도 되겠지만(하지만 이런 면에서 진정한 고수들은 따로있다), 학부시절 제대로 된 (그러니까 잘쓰고 못쓰고를 떠나) 리포트 하나 못 써본 나로서는 부러울 밖에.

그러나 글을 읽고나서 드는 생각은… 글쎄… 뭐랄까, 솔직히 말하면, “그래도 역시 잘 쓴 학부 리포트” 정도라는 것. 어차피 게슴츠레님은 학부생이니까, 이런 표현이 그에게 결코 누가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여기서 문제삼고픈 것은, 《진보평론》의 태도다. 이제 《진보평론》은 학부생 리포트도 실어주는가? 글쎄… 그러면 또 어떠랴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문제는 바로 이 학부생 리포트를 “일반논문”이라는 코너에 놓았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따라서 나는, 만약 이 글이 이를테면 “학부생 논문”과 같은 코너에 실렸다면, 학문후속세대를 양성하기 위한 《진보평론》의 노력에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또한 만약 이 글이 비록 학부생이 쓰긴 했지만 그 이상의 출중함을 보여주었다면 “일반논문”에 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결과는 둘 다 아니다. 어떤 이는, 학부생 아니라 교수의 논문 중에도 “학부생 리포트 수준도 안 되는” 것이 많다면서 “진짜 학부생 리포트”가 “일반논문” 코너에 실리는 게 무슨 문제냐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다고 해서 어떤 학술잡지도 “학부생 리포트”를 “일반논문” 코너에 싣지는 않는다. 여기서 우리,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학부생이 일반저널에 글을 내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외국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겠다)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분명 저널의 편집진이 “학부생”의 글을 받았을 땐 놀랐을 것이다. 그리고 정상적인 경우라면 싣지 않을 것이다. 뭐 그렇다고 여기서 굳이 “음모”까지 제기하고 싶진 않다.

어차피 그의 글을 조목조목 비판할 생각도 여유도 없고, 또 그럴 조건도 갖춰져 있지 않으므로 위와 같은 판단(“그래도 역시 잘 쓴 학부 리포트”)을 하는 까닭만 조금 밝혀보면 다음과 같다. 즉 예를 들어 위 글에는 “리카도와 베일리 – 가치에 관한 두 입장 혹은 화폐에 대한 한 입장”이라는 소절이 있는데, 그래도 버젓한 학술잡지에 실릴 “일반논문” 축에 끼려면 이런 대목에서는 적어도 리카도와 베일리에 대한 글쓴이 나름의 이해를 가지고서 “고진의 독해”를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식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글쓴이는 고진이 이 둘을 이해하고 전유하는 방식만을 제시할 뿐이고, 이런 글쓰기는 대체로 “학부 리포트” 수준에서 행해지는 방식이다. (여기서도 다시, 나는 글쓴이를 비판하는 게 결코 아니다. 다만 그 “버젓한 학술잡지”가 그것을 실은 배경이 궁금할 따름이다.)

그러니까 이건 (그러니까 위에서 언급한 바로 그 대목은) 그냥 책읽고서 내용정리하는 것 이상의 의미는 가지기 어렵다. 이를테면… 글쓴이는 리카도와 베일리를 위와 같이 “정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고진이 그들을 이해한 방식을 받아들이고 또 그 위에서 이후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 셈인데, 만약 고진의 그런 이해가 틀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내가 여기서 “틀렸다”라는 것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기본적인 이해의 영역에서 말하는 거다. 어쨌든 “일반논문”의 저자라면, “고진이 이해한” 리카도와 베일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조차도 “그냥” 리카도와 베일리에 대해서도 자기 나름의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또 (이것이 중요한데) 그것을 표현해야 한다.

사실은 나는 고진이 리카도와 베일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방식,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마르크스의 가치이론을 “초월(론)적”이니 어쩌니 하는 식으로 성격짓는 것이 못마땅하다. 게슴츠레님이 정리하셨듯 고진은 베일리를 가치에 대한 “관계론적 파악”의 원류로 이해하지만, 정작 마르크스는 베일리를 “양의 문제에 함몰된 학자”라는 식으로 보기도 했다. 즉 이런 관점에서 보면 베일리는 리카도와 별반 다를 게 없어진다. 뿐만 아니라 베일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 특히 그를 리카도와 대비시켜서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맥락들이 있는데, 그런 것이 고진에게선 그다지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는 것 같고, 그런 의미에서 고진의 문제제기는 뜸금없고 탈맥락적이다–그래서 “초월(론)적”이다!

어쨌거나 나는 열심히 연구하시는 게슴츠레님을, 그가 학부생이든 뭐든 상관없이, 응원하는 바다. 그러나 나는 그가, 또는 그와 비슷하게 마르크스의 《자본》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기반으로 현대사회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좀 더 “순수한” 방식으로 거기 임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여기서 “순수하다”는 것은 마음의 문제라기보다는, 《자본》을 있는 그대로 봐주라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의 “해석”에 의존하지 말고 말이다. 즉 그것이 고진이 됐든, 레닌이 됐든, 아니면 Backhaus나 Heinrich가 됐든 말이다. 물론 거대한 고전에 다가가기 위해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은 필요하기도 하고 어느정도는 권장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말하자면 “해석”과 “해설”을 구분할 줄은 알아야 한다. 그렇게 보면, 고진은 “해석자”이지 결코 “해설자”는 못 된다. 물론 내가 보기엔 그다지 훌륭한 “해석자”도 아니다. (언젠가 고진에 대한 글을 쓸 날이 올까…)

다시, 《자본》을 “순수한” 방식으로 보는 것은 뭘까? 간단히 말해 그것은 《자본》이 다름아닌 “경제학”(political economy) 저작임을 순순히 인정하는 일이다. 오늘날의 “경제학”(그것이 주류이든 비주류이든)을 떠올리면서 이런 말에 진저리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여기서 필요한 것은, “경제학”의 부정이 아니라 “경제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반성이다.
※ “경제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다음 글 참조: “사회” 관점의 지성사적 의의IIPPE(정치경제학 진흥을 위한 국제 발의) 소개

IIPPE(정치경제학 진흥을 위한 국제 발의) 소개

IIPPE를 소개하기 전에, “정치경제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우리나라(나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마르크스”라는 말 자체가 금기시되었다는 그 특수한 역사적 사정 때문에, 통 “정치경제학”이라고 하면 흔히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순화시킨 표현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이에 비해 서유럽/북미에서 “정치경제학”은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참조: Wikipedia] 이런 여러 의미들은 저마다 제각각 쓰이게 된 (지성)사적 맥락이 있겠지만, 대체로 그것들은 (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그 각자가 주로 직면하는 기존의 학문적 입장들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해당 대상에 대한 보다 총체적이고 복합적인 접근을 시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이런 현대적인 맥락만 보더라도 “정치경제학”이란 말하자면 역사/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주류적 입장에 대비되는) 비판적 접근법을 통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지성사적으로 봤을 때 정치경제학이란 오늘날 우리가 경제학이라고 부르는 것의 옛이름이기도 하다. “경제학”이 고대 그리스부터 쓰이면서 대체로 “가계의 운영”을 가리키는 용어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서 “가계”란 핵가족 시대인 오늘날 흔히 의미되는 것보다 대체로 훨씬 더 크고 시기/장소에 따라 상당히 다양한 범위/크기의 경제적 단위들을 일컫는데, 실은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서유럽의 범위 안에서는) 역사적으로 상당기간 동안 “가계운영으로서의 경제”란 곧 공동체 자체의 운영에 대한 것으로 유비(analogy)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다가 근대초(early modern)에 이르자 이런 유비가 더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되는 순간이 왔는데,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제부터는 “공동체의 경제”를 의미하기 위해 “가계의 경제”와는 다른 용어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요컨대 “공동체”의 운영은 이제 “가계”의 운영만 참조해가지고는 제대로 행해질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복잡한 문제들을 동반하게 된 것이다. 영국이나 프랑스 등의 경우를 놓고 보면 그 시기는 대체로 절대주의 왕정의 확립과 일치하며, 우리가 흔히 “근대사회에서의 정치와 경제의 분리“라고 말하는 현상이 이때부터 현저하게 관찰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로 이런 상황, 즉 기존의 “경제(학)”이라는 용어로는 더이상 “공동체” 전체에 대해 말할 수 없게 된 상황을 반영해서, “공동체 경제”를 일컫기 위해 “정치경제(학)”이라는 말이 새롭게 요구되었고 또 그것은 실제로 여러 사람들에 의해 어떻게 보면 동시다발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누가 가장 먼저였냐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있다). 결국 이렇게 보면, “정치경제학”이란 다름아닌 “사회” 자체에 대한 학문, 즉 (어떤 사상가의 말을 빌면) 근대사회의 물적(재)생산관계 자체에 대한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정치경제학”이란 명백하게도 오늘날 그 적자인 “경제학”이 의미하는 것보다 훨씬 그 관할범위가 넓으면서도 규정적(definite)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경제학 이외의 여타 사회과학들을 너끈하게 품을 수 있는 포용력을 가졌다고도 할 수 있다. 경제학을 비판하고 나아가 비판적 사회과학의 전통을 다시 세우기 위해 우리가 “정치경제학”을 모토로 삼는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다. 이것은 결코 “경제학”을 전면에 내세우겠다는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

What is IIPPE?

IIPPE는 다음과 같은 목표 아래 2006년에 설립되었습니다:

  1.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MPE)을 장려하고,
  2. 그를 통해 주류경제학을 비판함과 동시에,
  3. 그 밖의 다양한 비주류적 이론들과 비판적이고 건설적으로 교류하며,
  4. 경제학을 넘어 다른 사회과학 분과들에 두루 정치경제학을 장려할 뿐만 아니라,
  5. 진보적 정책들을 내고 진보적 운동들을 지원함으로써 실천활동과 연계를 꾀한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일 것은, IIPPE가 MPE를 장려한다고 해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집단이라고 보실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IIPPE에서는 스스로 자신을 MPE학자로 여기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IPPE가 MPE를 전면에 내세우는 까닭은, 실제로 비판적 사회과학의 역사를 봤을 때 MPE야말로 (물론 적지 않은 오류도 있었지만) 상당한 영향력과 지적 일관성을 가지고 주류사회과학에 대적해왔기 때문입니다. 즉 적어도 MPE는 우리에게 “대안”이라고 할만한 일관된 이론적 체계를 제공해주는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인 것입니다.

What does IIPPE do?

IIPPE의 일상적인 활동은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다양한 주제의 소모임(working group)을 단위로 이뤄집니다. 현재(2010년 1월) 활동중인 소모임은 14개에 이르며, 각 소모임은 자체적으로 연구 및 토론을 할 뿐만 아니라 세미나나 소규모 컨퍼런스 등의 형태로 그 성과를 외부와 공유하고 평가받기도 합니다. 누구나 일정한 조건만 채우면 소모임을 만들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IIPPE는 설립이래 매년 대학원생들을 중심으로 연례 워크숍을 열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 워크숍은 터키 Ankara에서 2009년 9월에 열렸습니다(2007년엔 그리스 Crete에서, 2008년엔 이탈리아 Procida에서). 그러나 앞으로는 좀 더 규모와 완성도를 높여 컨퍼런스도 열 것입니다. 첫 번째 국제 컨퍼런스는 올해(2010년) 9월 그리스 Crete에서 열립니다.

그 밖에 IIPPE는 현재 몇몇 학술저널로부터 특별호 요청은 물론 새 저널 창간이나 book series 제안도 받고 있으며, book series의 첫 번째 권이 Pluto 출판사로부터 2010년 1월에 나왔습니다. [링크]

Why now, why political economy, and why IIPPE?

경제학 내부에서 비주류는 완전히 씨가 마르고 있지만 여타 사회과학의 사정은 좀 더 복잡합니다. 한편으로 그것은 경제학에 의해 식민화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신자유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으로부터 지적 관심이 떠나고 있는 것에 발맞춰 정치경제학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배경 위에서 우리는, 맨앞에서 간단히 설명한 바의 그 “정치경제학”을, 특유의 편협함으로 사회과학 전체를 집어삼키고 있는 경제학을 비판하고 진정한 “사회에 대한 과학”으로서 사회과학 전체를 재구성할 때 내세웁니다. 이와 같은 지적 배경에서 IIPPE와 같은 기획의 필요성도 커지고 있으며, 특히 이제 막 새로 생긴 연구집단인 IIPPE엔 국내 진보적 연구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여지가 무한하고 이를 통해 사고와 연구 및 교류의 폭과 깊이를 더할 수 있을 것입니다.

More information on IIPPE?

IIPPE에 대한 모든 정보는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밖에 IIPPE와 관련된 한글로 된 소개로는 다음 글들을 참조할 수 있습니다.

  1. 김공회, 〈마르크스 연구의 새로운 장, 그리고 비판적 사회과학의 재구성: 2007년 《역사유물론》 연례 학술대회 보고〉,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5권 제3호, 2008년, 228‐52쪽. [링크]
  2. Ben Fine, 〈지구화와 발전 개념의 비판적 검토: 정치경제학의 역할은 무엇인가?〉, 《사회경제평론》 제26호, 2006년, 391‐427쪽.
  3. [추가: 2012년1월] 기타 이 블로그에서 ‘iippe’ 태그가 붙은 글들.

(1)에서는 IIPPE의 설립배경과 취지 등이 비교적 상세히 소개되어 있고, (2)는 IIPPE를 직접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의 출현을 필연적으로 만든 지적 배경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타 IIPPE에 관한 모든 문의는 이메일(iippe골뱅이soas.ac.uk)을 통해 하실 수 있으며, 저를 통해 한국말로도 소통이 가능합니다(ghgimm골뱅이gmail.com).

관심 있으신 분들은 주저하지 마시고 연락주세요.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특히 한국적인 맥락을 고려했을 때 IIPPE는 경제학 이외의 사회과학 전공자들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