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read_cap

(142) 절망적인 종속 – 가치의 오디세이

전에는 동일한 도구를 다루는 것인 평생의 전문직이었는데, 이제는 동일한 기계에 봉사하는 것이 평생의 전문직으로 된다. 기계는 노동자 자신을 유년시절부터 특정 기계의 한 부분으로 전환시키는 데 악용한다. 그리하여 노동자 자신의 재생산에 필요한 비용이 현저히 감소할 뿐 아니라, 동시에 공장 전체에 대한, 따라서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의 절망적인 종속이 완성된다. 다른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우리는 사회적 생산과정의 발전에 기인하는 생산성 증대와 그 발전의 자본주의적 이용에 기인하는 생산성 증대를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자본론 1권 15장, pp. 566-7; MEW 23, 445

자본주의적 생산은 사용가치의 생산을 매개로 한 가치의 생산이다. 그러므로 가치생산이 원인이고, 사용가치생산이 결과다. 가치생산이 내용이고 사용가치생산이 그 형식이다. 다만 이 형식 – 혹은 형태 – 은 가치생산이라는 내용의 존재양식이므로, 사용가치생산 없는 가치생산은 있을 수 없다.

가치생산은 (원인) 자본가 사이의 경쟁을 통해 생산성을 높인다 (결과). 가치생산에 대한 자본가의 욕구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에 생산성의 증대에도 한계가 없다. 자본주의는 무의식적으로 사회적 생산과정을 급속도로 발전시킨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가치는, 이 추상적 논증을 현실화해야 했다. 사용가치는 가치를 팔벌려 환영하지 않았고, 우선 가치는 사용가치를 무릎꿇려야 했다. 번번히 접신을 거부하는 노동력 사용가치를 굴복시키기 위해 가치는 기계라는 우회로를 택했다. 공장제 대공업의 “자본주의적 이용”은 가치의 사용가치 정복전이었으며, 가치에 대한 사용가치의 절망적 종속화의 과정이었다. 가치는 가격과 같은 단순한 숫자도 아니지만, 노동-자본 관계의 추상적 표현도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혼이다. 가치는 사용가치 안에 가만히 머물러 안식하지 않았다. 가치는 자신을 부정하고 사용가치 속으로 스스로를 내던져 그것을 자신의 틀에 맞게 변형시키고 새롭게 창조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오직 그 후에야 가치는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와 진정한 실질적인 자본이 될 수 있었다. 자본주의는 그야말로 가치의 오디세이이며, 자본론은 가치의 경험의 학인 것이다.

무한히 반복되는 가치의 오디세이는 쉬지 않고 “사회적 생산과정의 발전에 기인하는 생산성 증대”를 추동한다. 가치가 바로 이 지점에서 멈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가치는 언제나 그것의 “자본주의적 이용”으로까지 나아가 자신의 운동의 산물, 곧 총체로서의 자본주의를 “절망적인 종속”의 체제로 완성시키고 또 재완성시킨다. 가치는 어떤 장벽도 용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치의 긍정적인 측면은 계승하고 부정적인 측면은 철폐하자는 주장은 하나의 공상에 불과하다. 그 공상이 현실화하는 순간, 자신에 대한 어떠한 장벽도 용인하지 않는 가치가 긍정적으로 계승된 자기자신을 우선 철폐하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141) 노동시간 단축의 수단이 그 연장의 확실한 수단이 된다는 역설

노동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노동자와 그의 가족의 모든 생활시간(Lebenszeit)을 자본의 가치증식에 이용할 수 있는 노동시간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가장 확실한 수단으로 된다는 경제적 역설이 이로부터 나온다 – 자본론 1권 15장, p. 547; MEW 23, p. 432

노동자: 어이 자본가. 지난 1년간 기계를 이용해서 생산을 해봤는데, 생산성이 두 배로 높아졌어. 노총에 나가봤더니 다른 회사 노동자들도 같은 얘기를 하더라고. 너 정말 기계 잘 들여왔다. 니네 자본가들 돈에만 환장한 줄 알았는데 꽤 쓸모있어. 훌륭해. 이제 노동시간 반으로 줄이자. 어차피 반만 일해도 생산량은 똑같애.

자본가: 뭔소리여. 법정근로시간이 정해져 있는데. 너는 나랑 자유롭고 평등한 조건 하에서 고용계약서에 싸인했던거 아니여? 주당 40시간 노동은 내 권리라고!

노동자: 자자. 흥분하지 말고 차분히 내 말좀 들어봐. 내가 월급을 받으면 그걸로 생활에 필요한 사용가치들을 구매한단 말이야. 저기 가치 말고 사용가치라는 것도 있어요. 버스도 타야되고, 하루 세끼 먹어야 되고, 가끔 외식도 하고, 한 달에 한번은 영화도 먹고 술도 마시고. 인문학 강의도 듣고. 이걸 다 생산하는데 시간이 이제 절반만 필요하다니까? 굳이 내가 계속 40시간을 일해야 할 이유가 없잖아. 내가 뭘 더 달라는게 아니잖아.

자본가: 나는 사용가치 같은 거 먼지 몰라도 지금까지 잘 살았고, 앞으로도 그런 것에 관심둘 생각 전혀 없음. 그리고 40시간은 너희들 대표자가 국회에서 정한거야. 왜 이제 와서 딴소리여.

노동자: 아놔. 내가 그동안 굳이 얘기를 안했는데, 내 노동시간이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으로 구분되어 있는 거 다 알고 있다고. 너한테 중요한 건 어차피 비율 아니야? 필요노동시간 절반으로 줄었으니까 공평하게 잉여노동시간도 절반으로 줄이자. 내가 착취 없애라고 까지는 안할게.

자본가: 웃기고 있네. 너네는 무조건 40시간 일해야 돼. 노동시간 줄일 거면 내가 미쳤다고 기술개발하냐? 나도 다 살자고 이러는거야. 다른 자본가들 다 난리라고. 옆 공장은 생산성이 두배 반이나 올랐어. 걔네가 덤핑하면 나 쫄딱 망한다.

노동자: 정말 이해가 안되네. 너네 전국경제인연합회랑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모여서 뭐하냐? 같이 모여서 합의를 해라. 합의를. 비용 갹출해서 기술개발 같이 하면 되지 서로 피곤하게 뭐하는 짓들이여.

자본가: 허허. 니가 잘 모르나본데 다들 금메달 딸 각오로 피터지게 노력해야 되는거야. 그래야 사회 전체적으로 기술수준도 높아지고 모두들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보이지 않는 손인가 발인가가 다 알아서 한다고. 이게 내 철학이야 철학.

노동자: 다시 차분히 생각해봐. 우리가 계속 40시간 씩 일하면 생산량이 두배로 늘어날 거 아니냐, 생산성이 두 배로 늘어났으니까. 그지? 우리들 몫 빼고 남는 분량이 이제 예전에 비하면 세배야 세배. 이거 어디다 팔거야. 사용가치 이거 만만한게 보면 안된다. 그러다가 재고 쌓이고 은행빚 못갚고 공황오고 이런거 아니여? 무턱대고 너무 많이 생산하면 다 망한다고.

자본가: …

노동자: 음… 니가 이해도 못하는 것같고 또 욕심 있는거 다 아니까 우리가 통크게 양보할게. 계속 40시간씩 일할테니까 우리 몫을 두 배로 올려줘. 비율 그래도 유지하자. 그러면 우리가 저금 안하고 공장 물건 아낌없이 사 줄테니까. 재고 쌓이면 서로 골치 아프잖아. 그리고 니네 신고전파 경제학인가 뭔가 그거 생산성 두배 오르면 임금도 두배로 올라야 된다며. 그래야 균형인가 뭔가 아마 다시 성립될걸. 그거 되게 중요하다. 그러니까 학교에서 배운대로 해. 노동시간 안 줄일려면 대신 월급 올려. 상생하자.

자본가: 허허. 경제학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런 건 교수님들이나 하는 얘기고 우리는 그냥 본능 따라 살면서 가끔 호탕하게 웃어주면 끝이야. 그리고 니네가 사주긴 뭘 사줘 이것들아. 우리나라 무역입국한거 모르남? 상사맨들이 외국에 내다 팔면되지.

노동자: …

자본가: 그리고 이놈들이. 생각해 보니까 열이 확 오르네. 이제 기계 들여와서 니네 기술이나 경험도 별로 필요 없거든! 외국 사람들 중에 니네 월급 반만 줘도 일한다는 애들 널렸어. 걔네 며칠 빡쎄게 뺑뺑이 돌린다음에 현장에 투입하면 되는데 어디서 개소리야. 그렇지 않아도 밤중에 기계 놀리는 거 아까워 죽겠는데. 이것들이 지금까지 기술 좀 있다고 뻣뻣하게 나와서 스트레스 받았는데.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로 안다더니 딱 그 짝이구만. 어디서 재료 나부랭이가 인간 행세야. 너네 이제 필요 없으니까 셋 셀 동안에 꺼져라. 아쉬우면 밤에 나와서 일하던가.

(140) 자본주의 이중성이론, 인간재료

나는 노동가치론이라는 표현에 약간의 불만을 갖고 있다. 노동가치론을 풀어서 설명하면 노동이 가치(와 가격)의 원천이라는 이론이라고 할텐데, 이것이 그 자체로 잘못됐다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그리고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전제 하에서만 자본주의적 착취를 해명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올바르고 순수하고 단순한 명제의 진실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노동(이)가치(의 원천이라는 이)을 강조하는 마르크스 해석의 폐해는 이것이 노동이 가치의 원천이라는 단순한 (그러나 올바른) 주장을 넘어서지 못하고, 마르크스가 예술적 총체로 여긴 자본론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며 왜곡한다는 것에 있다. 여기서 나는 다음과 같은 주장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1) 노동만이 가치의 원천이므로 노동이 아닌 것은 가치와 무관하다; 2)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비생산적 노동에는 별 의미가 없으며 생산적 노동만이 분석의 가치가 있다 – 이런 시각을 가진 이들은 어떤 노동이 생산적 노동이냐 아니냐의 문제에 집착한다; 3) 중요한 것은 착취의 존재를 해명하는 것이다; 4) 노동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가치를 생산한다. 이런 류의 해석들은 공통적으로 노동과 가치를 (적어도 암묵적으로) 동일시하며, 따라서 대체 어떠한 역사적 조건에서 노동이 가치의 실체가 되는지, 그리고 왜 마르크스가 착취의 해명에 그치지 않고 현상형태의 영역으로의 상승을 시도하는지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대조적으로 마르크스에게 있어 노동과 가치는 결이 다른 개념이다. 노동은 가치의 실체이지만, 노동은 가치뿐만 아니라 사용가치 역시 생산한다. 가치가 일면적이라면 노동은 이중적이다. 서로 가깝고도 먼 사이인 것이다.

그래서 다이앤 엘슨 (Diane Elson)과 같은 사람은 이러한 폐해에 주목해서 노동가치론 (the labour theory of value) 대신 노동의 가치이론(the value theory of labour)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노동에 근거한 가치(와 가격)의 해명이 아니라, 노동이 왜 가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밝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노동가치론이라는 표현에는 스미스, 리카도 등의 고전파 정치경제학자와 마르크스 사이의 연속성을 과장한다는 문제도 있다. 노동가치론은 마르크스가 최초로 제시한 것이 아니다라는 주장은 분명히 옳지만, 노동가치론을 매개로한 연속성이 마르크스와 고전파 정치경제학 사이의 관계의 요체인 것은 아니다. 나는 연속성의 측면보다는 단절의 측면이 훨씬 크고, 마르크스의 이중성 이론이 바로 단절의 핵심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노동가치론의 관점에서 보면 리카도의 “정치경제학과 조세의 원리” 1장은 자본론 1권 1장 1절의 내용과 놀랄만하게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초반부에 가치와 사용가치 사이의 구분, (교환)가치량이 노동의 양에 의해 규정된다는 주장이 제시되며, 심지어 사용가치가 없는 상품은 가치를 갖지 않는다는 언급도 등장한다. 하지만, 리카도는 사용가치와 가치 사이의 관계를 상품의 이중성이라는 측면에서 다루지 않고, 따라서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이중성에도 주목하지 않는다.

그래서 작명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마르크스의 독창성과 차별성을 부각시킨다는 측면에서  ‘자본주의 이중성이론’이라는 표현을 제안할 것 같다. 영어로 하면 the dual-character theory of capitalism 정도가 될까.

마르크스는 1867년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본론의 두가지 최고의 포인트 중 하나로 노동의 이중성에 대한 논의를 꼽으면서 이것이 “모든 종류의 사실의 이해의 근본”이 된다고 했다. 마르크스에게 이중성이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두 가지 차원 – 즉 필요의 충족을 위해 조직화된 경제체계로서의 차원과  임노동에 기초한 계급사회로서의 차원 – 을 개념화하고 서로를 전제하는 이 두 차원의 모순적 성격을 명백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이중성은 자기증식한다. 노동이 이중적이므로 (추상노동 vs. 구체노동) 상품 역시 이중적이고 (가치 vs. 사용가치) 이 내적 이중성은 일반상품과 화폐의 외적 대립으로 표현된다. 마찬가지 이유로 생산과정 또한 이중적이다 (가치증식과정 vs. 노동과정).  생산과정이 이중적이므로 지휘의 역할도 이중적이며 (노동과정의 조직 vs. 지휘의 전제성), 인간 역시 주체로서의 인간과 객체로서의 상품(물건)으로서의 이중적 존재로 전락한다.  여기에 더해 나는 노동의 이중성, 가치와 사용가치 사이의 모순이 생산관계와 생산력 사이의 모순으로까지 발전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추후에 상세히 논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패망의 유전자는 자본주의의 세포형태인 상품 속에서 그 발현을 기다리고 있다.

이중성 이론의 또다른 핵심은 서로를 전제하면서 서로를 배제하는 쌍방의 모순관계에서 언제나 한쪽이 공세를 취하고 다른 한쪽은 수세에 몰려 있다는 사실이다. 상품이 가치이기 위해서는 우선 사용가치이어야 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사용가치의 생산이 가치생산의 수단으로 변질된다. 노동과정도 마찬가지다. 노동과정의 생산물이 가치의 형태를 취하는 순간부터 노동과정 그 자체는 가치생산과 가치증식에 걸맞는 형태로 변형되어간다. 단순협업이 매뉴팩쳐로 매뉴팩쳐는 기계제대공업으로 발전하며, 노동자는 노동과정의 주체에서 인간재료로 전락한다. 여기에 대해 마르크스는 이렇게 담백하게 쓴다.

대공업의 출발점은 노동수단의 혁명이며, 그리고 이 혁명은 공장의 편성된 기계체계 안에서 가장 발달한 형태를 얻는다. 이 객체적 유기체에 인간재료(Menschenmaterial)가 어떻게 합체되는가를 고찰하기 전에 … -자본론 1권 15장, p. 529; MEW 23, p. 416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모순적) 이중성을 1장을 제외하고는 별도로 상세히 논의하지는 않지만, 기계제 대공업을 다루는 15장에도 이중성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인식이 여기저기 녹아 있다. 예를 들어,

우선 말해두어야 할 것은, 기계는 노동과정에는 언제나 전체로 참가하지만 가치형성과정[가치증식과정이 맞다]에는 언제나 일부씩만 참가한다는 사실이다 … 생산물형성요소로서의 기계와 가치형성요소로서의 기계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 어떤 노동수단이라도 노동과정에는 언제나 전체로 참가하고 가치형성과정에는 항상 그것의 평균적 마멸에 비례해 일부만 참가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 p. 519-20; p. 408

그리고 각주24에서 마르크스는 리카도가 이 이중성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지적한다.

리카도는 … 다른 곳에서는 [기계의] 이러한 작용 [heesang: “기계의 생산적 효율성이 도구의 그것에 비해 크면 클수록 기계의 무상봉사의 크기도 그만큼 더 크다”는 것]에 주목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가 노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 사이의 일반적 차이를 알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다 – p. 520; p. 409

(139) 강신준과 프루동의 긍정의 변증법 – 번외편

[경향신문 연재 ‘오늘 자본을 읽다’에 대한 김성구 교수의 비판에 대한 답글]에서 강신준은 다음과 같이 쓴다.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를 토대로 그것을 넘어서는 “부정”을 모색하는 것, 그것이 바로 변혁의 과제로 내가 얘기했던 성숙의 의미인 것이다 … 그래서 그것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건설된다는 것을 강조한 의미인 것이다.

그는 자본론 1권 2판 후기의 다음 구절이 그의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생각한다.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 속에 그것의 부정과 그것의 필연적인 몰락에 대한 이해 … – 강신준 역 [자본] 1권, p. 61.

마르크스에게 있어 변증법은 현존 – 자본주의 – 의 부정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가 부정의 전제조건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본주의의 긍정적 측면을 인정하고 자본주의를 충분히 성숙시켜야 한다는 것인데, 성숙한 자본주의의 기준이 무엇인지 애매할 뿐더러 마르크스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믿기가 어렵다. 그래서 자본론 1권 2판 후기의 관련 구절을 꼼꼼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독일에서는 이 신비화된 형태의 변증법이 유행했는데 이는 그것이 현존하는 것들을 이상적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합리적인 형태의 변증법은 부르주아들과 그들의 교의를 대변하는 자들에게 분노와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그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 속에 그것의 부정과 그것의 필연적인 몰락에 대한 이해를 함께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성하는 모든 형태를 운동의 흐름으로 파악하며, 따라서 언제나 그것들을 일시적인 것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 강신준 역 [자본] 1권, p. 61.

우선 “신비화된 형태의 변증법”은 헤겔 우파의 변증법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프로이센 제국을 역사의 변증법적 발전의 최종단계로 보았다. 이렇게 변증법이 현존하는 것을 긍정하고 이상화하는 이론이라면 그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합리적인 형태의 변증법”은 마르크스의 변증법이다. “신비화된 외피 속에 감추어진 합리적 핵심”이며,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 속에 그것의 부정과 그것의 필연적인 몰락에 대한 이해를 함께 간직하고 있”는 변증법이다. 마르크스는 긍정이 부정을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강신준에게서처럼 긍정이 부정의 “모색”을 위한 “토대”인 것은 아니다 (번역에 대해 지적하자면, “그것의 부정과 그것의 필연적인 몰락” 대신 “그것의 부정, 즉 그것의 필연적인 몰락”이 옳다. “부정”과 “몰락”이 동격이다. 비봉판에는 “그것의 부정[즉, 그것의 불가피한 파멸]”으로 올바르게 번역되어 있다).

대상의 “긍정적인 이해 속에 그것의 부정 … 에 대한 이해”가 포함 혹은 간직되어 있다는 것은 대체 무슨 말인가. 대상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와 부정적인 이해가 병존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라는 대상에 대해 위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는 긍정적 이해 외에도 자본론 출판 데드라인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공언한 것보다 10년이 훨씬 지난 후에 출판된다) 부정적 이해가 가능하다. 여기서 긍정은 좋은 것, 부정은 나쁜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긍정과 부정 사이에는 별다른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마르크스는 데드라인을 지키면서도 위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긍정이 부정을 포함하고 있어 긍정과 부정이 상호 연관되어 있을때, 긍정과 부정은 좋고 나쁨이 아니라 정립과 반정립, 실현과 해소의 대립쌍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헤겔은 대논리학 서론(임석진 번역, 벽호)에서 변증법에 대해서 이렇게 쓴다.

의식의 제형태가 각기 저마다의 실현을 이룩하면서도 또 어느덧 자기를 해소시키는 가운데 결국 여기서 얻어지는 그의 결과란 다만 자기자신의 부정일 뿐이니 – 이럼으로써 좀더 고도의 형태로 이행하게 되는 셈이다. 학적인 진전을 이룩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긴요한 유일한 길은 다음과 같은 논리적 명제를 인식하는 데 있으니, 그것은 즉 부정적인 것은 또한 그에 못지 않게 긍정적이며 자기 모순적인 것은 결코 영이나 추상적인 무로 해소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의 특수적인 내용의 부정 속으로 해소됨으로써 또 달리 말하면 결국 그와같은 부정은 전면적, 전칭(全稱)적인 부정이 아니라 그 자체가 역시 해소되게 마련인 특정한 사상(事象; Sache)의 부정이며 따라서 특정한, 규정적 부정이라는 것이다. (43, 강조 추가)

반대물을 통일성 속에서, 혹은 긍정적인 것을 부정적인 것 속에서 파악… (47)

변증법에서 대상은 자신을 실현하는 것을 통해 자신을 해소하며 이를 통해 좀더 고도의 형태로 이행한다. 실현에 대한 이해(긍정적인 이해)가 바로 해소(와 이행)에 대한 이해(부정적인 이해)에 해당하므로 “부정적인 것은 또한 그에 못지 않게 긍정적”이며, 변증법은 “긍정적인 것을 부정적인 것 속에서” 파악한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변증법에서 자본주의의 자기실현은 곧 자본주의의 자기해소이다. “부르주아지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매장인을 만들어 낸다” (공산주의당 선언,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 1, p. 412, 박종철 출판사). 대조적으로 강신준의 변증법에서는 대상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가 우선하고 그것을 “토대”로 부정을 “모색”해야 한다. 긍정(실현)이 부정(해소)과 하나의 총체를 이루는 대신 긍정이 부정의 전제조건으로 기능한다.

강신준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긍정적 이해의 핵심은 자본주의에서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한다는 점을 파악하는 것에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사명이다). 그런데 유기체로서의 자본주의는 쇠퇴의 길에 접어들게 마련이므로, 자본주의의 이 긍정적이고 좋은 측면은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바로 이때 자본주의의 부정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 착취라는 자본주의의 나쁜 측면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타파가 아니라 성숙의 결과인데,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좋은 측면에 기반하여 나쁜 측면을 지양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고도로 발달한 생산력이 사회주의의 자양분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우선은 자본주의에 대한 긍정적 이해에 기반하여 그 성숙을 촉진하는 것이 된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풍요롭게 내린다는 식이다. 죄는 죄로서 나쁘지만, 은혜의 전제조건이 된다는 긍정적 측면을 가지고 있이므로, 은혜를 풍성히 받기 위해 죄를 짓는 것에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이미 죄의 권세에서 벗어난 이상 어떻게 그대로 죄를 지으며 살 수 있느냐고 강변한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은 자본주의의 운동법칙(긍정)이 바로 그 패망의 법칙(부정)임을 가르쳐준다. 자본주의의 성숙이 곧 그 패망이므로 우리는 자본주의를 더욱 더 발전시키는데 주력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의 패악을 충분히 경험했고 그것이 일시적인 체제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이상, 그것을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타파하여 이 고통스러운 변증법을 마침내 완성할 것인가.

강신준의 변증법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뿌리 깊다. 그것은 좋은 측면은 유지하고 나쁜 측면은 제거해야 한다는 프루동의 변증법이다. 마르크스는 프루동의 변증법을 비판하기 위해 [철학의 빈곤]을 썼다. 하지만 이러한 치열한 학문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프루동은 건재했다. 마르크스가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했을 때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칭하는 둘째 사위 라파르그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프루동이 라파르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가족관계의 친밀함도, [철학의 빈곤]도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방어하는데 충분치 않았던 것이다. 강신준의 [오늘 ‘자본’을 읽다]를 단순히 자본론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없는 까닭이다.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에서 이렇게 쓴다 (강민철, 김진영 옮김, 아침새책 117-8,  131, 강조는 원문; 맑스 엥겔스 선집 1권에도 수록)


이제 프루동이 헤겔의 변증법을 정치경제학에 응용하면서 어떠한 수정을 가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프루동에게 있어서 모든 경제적 범주들은 좋은 측면과 나쁜 측면이라는 양 측면을 동시에 갖는다. 그는 소부르조아가 위인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경제적 범주를 관찰한다: 나폴레옹은 위인이었다, 그는 훌륭한 일을 많이 했고 동시에 많은 악을 범했다.

프루동이 보기에는 좋은 측면나쁜 측면, 장점과 단점이 서로 합쳐져서 모든 경제적 범주의 모순을 형성한다.

문제의 해결은 좋은 측면을 유지시키고 악을 제거하는 것이다.

노예제는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범주이다. 따라서 그 역시 두 개의 측면을 갖는다. 노예제의 나쁜 측면은 젖혀두고 좋은 측면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두말할 필요조차 없지만 우리는 수리남, 브라질, 북미의 남부지역에 있는 직접적 노예제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직접적 노예제는 기계, 신용만큼이나 부르조아 산업의 중추이다. 노예제가 없다면 면화를 구할 수 없고, 면화가 없다면 근대 공업이 있을 수 없다. 식민지에 가치를 부여해준 것이 바로 이 노예제이다. 세계무역을 창출해냈던 것은 식민지이며, 대규모 공업의 전제조건이 세계무역이다. 그러하기에 노예제는 가장 중요한 경제범주인 것이다.

노예제가 없다면, 가장 발전된 나라인 북미는 아마도 가부장적 나라로 바뀌었을런지도 모른다. 세계 지도에서 북미를 지워보라. 그러면 남는 것은 근대 문명과 교역의 몰락이라는 무질서뿐일 것이다. 노예제를 사라지게 해보라. 그러면 북미를 세계지도에서 지울 수 있으리라.

노예제는 경제범주인 까닭에 모든 나라에서 항상 존재해왔다. 근대 국가는 자신의 나라 내부에서만큼은 노예제를 위장시켜야만 하지만, 신세계에 대해서는 노예제를 노골적으로 강요해왔다.

노예제를 수호하기 위해 프루동은 무엇을 할 것인가?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정할 것이다: 이 경제범주의 좋은 측면을 유지하고 나쁜 측면을 제거하라.

헤겔에게는 정식화할 문제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변증법만이 있을 뿐이다. 프루동은 헤겔의 변증법은 전혀 갖지 못한 채 그 언어만을 도용할 뿐이다. 그에게 있어 변증법적 방법은 좋은 측면과 나쁜 측면에 대한 독단적인 구별에 있다.

잠깐 프루동을 범주로서 예를 들어보자. 그의 좋은 측면과 나쁜 측면, 장점과 단점을 검토해보자.

프루동은 인류 선을 해결해야 할 문제를 설정했다는 점에서 헤겔에 비해 장점을 가지고 있다면, 변증법적 출산의 진통에 의해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내는 문제에 있어서는 무기력하다는 결점을 지니고 있다. 변증법적 운동을 완성하는 것은 두 대립된 측면의 공존, 양자의 투쟁, 새로운 범주에로의 이행이다. 나쁜 측면을 제거한다는 그 문제 설정은 변증법적 운동에는 부족하다. 본래의 모순적 성질에 의해 자신을 정립시키고 대립시켰던 것은 범주가 아니다. 범주의 두 가지 측면 사이에서 흥분하고 당황하고 안달이 났던 것은 바로 프루동이다.

정상적 방법으로는 탈출하기 어려운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서 프루동은 높이 뛰기를 하고는 일약 새로운 범주로 옮겨간다. 그리하여 이성 속에서의 연속적 계열이, 그가 보기에도 놀랍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는 바로 곁에 있는 손쉬운 것을 손에 넣어 첫번째 범주로 삼고는, 자의적 방법에 의해, 정화되어야 할 범주의 결점을 치유할 수 있는 성질이 거기에 있다고 추정했다. 따라서 우리가 프루동을 믿는다면, 조세는 독점의 결점을 치유하고, 교역의 균형은 조세의 결점을 치유하고 대토지 소유는 신용의 결점을 치유해야 한다. 

프루동에 따르면 분업은 일련의 경제적 발전을 전개시킨다.

분업의 좋은 측면 – “본질적인 면에서 고려한다면, 분업은 조건과 지성의 평등이 실현되는 방식이다.”

분업의 나쁜 측면 – “분업은 우리에게는 빈곤의 원천이 되어왔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신에 고유하고 자신의 생산성의 주요한 조건인 법칙에 따라 스스로를 분할시킴으로써, 노동은 결국에 가서는 스스로의 목적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파괴시킨다.”

해결되어야할 문제 – “분업의 결점을 일소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유용한 효과를 보존하는 새로운 합성체”를 발견하는 일.

(138) 자연력과 과학 그리고 외부성

우리는 협업과 분업으로부터 생기는 생산력은 자본가에게 아무런 비용도 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사회적 노동이 만들어내는 자연력이다. 생산과정에 적용되는 증기, 물 등과 같은 자연력도 역시 아무런 비용이 들지 않는다. – 자본론 1권 15장, 518; MEW 23, 508

경쟁균형의 존재를 가정하는 주류경제학에서 일반적인 생산요소는 그 한계생산만큼의 보상을 받는다. 예를 들어 임금 = 노동의 한계생산; 이자율 = 자본의 한계생산; 그래서 경제적 이윤=0. 생산에 기여하지만 아무런 비용이 들지 않는, 그러니까 아무런 보상을 받지 않는 생산요소의 경우, 이것을 생산요소라고 칭하지 않고 생산과정에 “양의 외부성”이 존재한다고 얘기한다.  보통 양봉장 옆의 정원 – 벌이 공짜로 식물의 교배에 기여한다 – 이나 과학기술 – 자동차 생산에 대한 뉴턴의 기여는 보상받지 않는다 – 이 양의 외부성의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된다.

이렇게 아무런 비용이 들지 않지만 생산에 기여하는 것들을 – 여기에는 “협업과 분업으로부터 생기는 생산력”이 포함된다 – 마르크스는 “자연력”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마르크스의 “자연력”은 주류경제학의 양의 외부성과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전류의 작용범위 안에서는 자침이 편향한다든가, 주위에 전류가 돌고 있으면 철에서 자기가 발생한다는 법칙 등은 일단 발견한 뒤에는 한푼의 비용도 들지 않는다.

과학이 주류경제학에서 “양의 외부성”으로 간주되는 것처럼 마르크스는 과학을 “자연력”이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와 주류경제학의 차이는? 주류경제학이 사용가치의 경제학이라면 가치론은 가치의 경제학이다. 사용가치의 생산에는 토지, 노동, 기계, 도구, 자연력 등이 필요하지만, 가치의 생산의 경우에는 (토지, 기계, 도구, 자연력 등을 이용하는)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 (물론 가치생산에서 기계, 도구는 과거노동의 결정체로 전환된다). 증기, 물, 협업과 분업으로부터 생기는 자연력, 과학 등등은 사용가치의 생산에 기여하지만, 그리고 때때로 공짜로 더 많은 사용가치의 생산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리고 가치생산의 전제로 기능하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직접 가치를 생산하지는 못한다. 가치가 사회적 관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범주이기 때문이다. 증기와 물과 협업과 과학이 인간 사이의 관계에 끼어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부성의 가치론 같은 것은 없다. 잊지말자. 가치론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이론이다.

기계는 노동과정에는 언제나 전체로 참가하지만 가치형성과정에는 언제나 일부씩만 참가한다

사용가치의 생산의 관점에서 보면 (동력기, 전동장치, 작업기로 구성된) 전체로서의 기계가 생산에 참여한다. 가치생산의 관점에서는 기계는 과거노동의 결정체에 불과하며 (그것이 동력기, 전동장치, 작업기로 이루어져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상품생산과정에서 마멸되는만큼의 가치를 최종생산물에 이전할 뿐이다.

과학도 마찬가지다. 과학은 노동과정에는 언제나 전체로 참가하지만, 가치형성과정에는 (그것이 공짜로 사용되기 때문에) 참가하지 않는다.

재밌는 것은 신고전파 경제학의 내생적 경제성장이론이 경제성장의 원동력으로 지식, 과학, 기술의 양의 외부성 – 정확하게는 지식생산의 생산성을 높이는 외부성 – 을 제시한다는 사실에 있다. 앞에서 외부성의 가치론 같은 것은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경제성장의 가치론 같은 것도 없다. 가치론의 관심은 자본축적에 – 이것은 성장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 그리고 자본축적과정과 더불어 함께 축적되는 모순과 그 결과들에 있다.

(137) 빌어 온 토대를 타파하고

발명의 수가 증가하고 또 새로 발명된 기계에 대한 수요가 증대함에 따라 기계 제작업이 다양한 독립부문으로 분화되었고, 기계제작 매뉴팩쳐 안의 분업이 더욱더 발전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매뉴팩쳐에서 대공업의 직접적인 기술적 토대를 본다. – 자본론 1권 15장, 513; MEW 23, 402

발명의 수가 증가하고 새로 발명된 기계에 대한 필요도 증대한다. 마르크스에게서는 사회적 분업의 발전은 언제나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필요의 발전과 (경향적으로) 병행하여 이루어진다.

이 매뉴팩쳐는 기계를 생산했는데, 그 기계의 도움에 의해 대공업은 [그것이 최초에 장악한 생산부문들에서] 수공업 생산과 매뉴팩쳐 생산을 폐지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기계를 생산하는 체계는 자기에 적합하지 않은 물질적 토대 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naturwüchsig) 생긴 것이다. 그 체계가 일정한 발전단계에 도달했을 때, [그 동안 종래의 형태로 더욱 발전해 온] 이 빌어 온 토대를 타도하고 자신의 생산방식에 상응하는 새로운 토대를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매뉴팩쳐에서 기계제 대공업으로의 이행을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의 결과로 설명하고 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속에서 싹트는 “자연발생적” 변화가 반드시 봉건제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으로의 이행과 같은 거대한 스케일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즉, 기계로 대표되는 생산력이 매뉴팩쳐가 대표하는 생산관계(지식노동과 육체노동의 점진적 분리, 노동의 위계제, 노동의 일면화와 전문화)의 틀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이 빌어온 토대”를 타도하고 “새로운 토대”의 창조에 나섰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빌어온 토대는 정확한 번역은 아니지만 적절한 의역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대공업은 [그 특징적 생산수단인] 기계 그 자체를 기계로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때부터 비로소 대공업은 자기에게 적합한 기술적 토대를 창조했으며 자기 자신의 두 발로 서게 되었다. – 516

대공업은 “자기에게 적합한 기술적 토대를 창조했으며”, 이를 통해 새로운 생산관계를 창조해냈다. 기계제 생산이 기계에 의한 기계의 생산에 이르렀을 때 매뉴팩쳐에 기반한 상품생산과 매뉴팩쳐가 대표하는 생산관계 (그리고 사회적 관계)는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게되었으며 비로소 매뉴팩쳐에서 기계제 대공업으로의 이행이 완료되었다.

사회적 변화에 대한 설명은 이와 같아야 한다. 새로운 생산관계, 새로운 사회적 관계는 우선은 기존의 물질적 토대 속에 싹을 틔우고 자라나지만 종래에는 이 토대의 기술적, 사회적 제한을 타파하고 새로운 토대를 건설하는 것을 통해서만 지배적인 생산관계, 사회적 관계로 자리잡을 수 있다.

현대자본주의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살아가는 시대를 대격변의 시대, 혹은 요새 유행하는 말로 대사변의 시대로 규정하고 싶어한다. 우리시대가 대격변, 대사변의 시대이기 위해서는 과거는 무격변, 무사변의 지루한 시대여야만 한다. 오늘날의 경제가 지식, 협력, 협업, 공통되기로 대표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시대를 물질노동과 육체노동의 시대로 규정하는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과거는 현재가 아닌 것으로, 현재는 과거가 아닌 것으로 부정적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마르크스의 경우에도 물론 현재는 과거와 대립된다. 최신식 생산관계는 구식 생산관계로부터 스스로를 차별화한다. 하지만 현재는 언제나 과거의 산물로서, 현재와 과거는 하나의 연속체 속의 대립물로서 이해된다.

따라서 현대자본주의를 경제의 서비스화의 시대, 인지자본주의의 시대 혹은 지식경제의 시대로 이론화함에 있어 이 새로운 시대가 어떠한 빌어온 토대에서 자라 이 토대를 타파하고 지배적인 생산관계로 자리매김했는지를 밝히는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경제의 서비스화에 주목하는 이들은 반드시 “빌어온 토대”인 제조업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서비스 산업인 운수업의 경우, 자동차 산업의 발전 정도가 운수업의 폭발적인 확장에 일종의 장애물로 기능하고 있는가? 서비스업의 확장은 (기계제 대공업이 기계제작 매뉴팩쳐를 기계화했듯이) 제조업을 서비스화하면서 그 “빌어온 토대”를 과연 타파하고 있는가? 경제 내의 서비스업의 확장은 경제의 본질적인 변화의 결과인가 아니면 형태 상의 변화일 뿐인가.

(136) 마르크스와 특허

와트의 위대한 천재성은 그가 1784년 4월에 얻은 특허권의 명세서에 나타나 있는데, 거기에는 그의 증기기관이 어떤 특수한 목적을 위한 발명이 아니라 대공업의 보편적 동력기로 서술되어 있다. – 자본론 1권 15장, 508, MEW 23, 398

자본론 1권에서 마르크스는 “특허”라는 단어를  세번 언급하는데, 두번은 남을 조롱하기 위해 일종의 비유로 사용하고 나머지 한번은 바로 위에 인용한 구절에서 기술의 보편성에 주목한 “와트의 위대한 천재성”의 근거를 제시하는데 활용한다. 2, 3권이나 잉여가치학설사의 경우도 별로 다르지 않다. 특허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은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지적재산권의 경제적, 정치적, 이론적 중요성이 점점 강조되고 있는 오늘날의 시각에 보면 이해가 되면서도 의아하고, 안타까운 측면이 많다.

1. 이해가 된다

마르크스 시대의 특허와 오늘날의 특허, 좀더 일반적으로 지적재산권을 동일선상에서 분석하기는 어렵다. 영국의 특허 통계를 살펴보면 마르크스가 자본론 1권을 출판한 1867년 특허출원건수는 3,723건이었으며, 이는 점진적으로 증가하여 마르크스가 사망한 1883년에는 대략 6,000건에 이른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1884년에 특허출원건수는 17,110건으로 급속도로 늘어나고 1900년대 초에는 연간 출원건수가 30,000건을 돌파한다.

양적팽창 이외에도 특허제도는 질적인 변화를 겪었다. 과거에는 특허가 주로 새로운 기술이나 발명에 부여되었지만, 우리 시대에는 새로운 생명체와 인간유전자도 특허의 범위에 포함된다. 게다가 특허 이외에도 저작권이나 디자인, 상표권 등의 적용 범위 역시 넓어졌음을 감안해야한다.

2. 그렇지만 의아하다

마르크스는 와트의 1784년 특허명세서를 자본론에 언급할만큼 기술에 커다란 관심이 있었다. 그런 그가 볼턴앤와트(Boulton and Watt)사가 특허를 통해 상당한 라이센스 수입을 올렸고, 특허권을 침해한 이들과 송사를 벌였던 일을 몰랐을리가 없다. 자본주의적 경쟁에서 혁신과 신기술개발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했던 마르크스가 왜 특허에 별 관심을 갖지 않았는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연구과제가 될 수 있겠다.

3. 안타깝다

주류경제학에서는 특허 등의 지적재산권을 경제성장의 한 필수적인 조건으로 본다. 지식은 그 비경합성과 비배제성 때문에 양의 외부효과를 갖는 ‘생산요소’이고 따라서 별도의 보호장치가 없다면 사회전체적으로 지식이 과소생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생적 성장이론의 대표적인 모형인 폴 로머의 1990년 모형 역시 지적재산권을 통한 지식의 영구적 독점을 전제한다.

특허가 일종의 인센티브로 작용하여 혁신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면서도, 기술의 사회적 전파를 방해한다는 부정적인 면도 갖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전자는 극대화하고 후자는 극소화하기 위한 절묘한 제도를 설계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실용적인 사람들도 많다.

좌파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이들은 보통 특허나 지적재산권을 싫어한다. 이해도 되고 공감도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제도의 기원과 역할과 의의를 학적으로 정리하는 것에 더 관심이 간다. 문제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것. 그래서 마르크스가 약간의 단초가 될만한 언급이라도 남겨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자본론 3권의 농업지대에 대한 분석을 지적재산권 분석에 원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마르크스의 지대론은 잉여가치 중 일부가 토지의 독점으로 인해 지대로 전유된다는 단순한 이론이 아니다. 오히려 핵심적인 것은 이 지대가 표현하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의 물적 현실 (예: 지주 계급의 존재로 인한 농업의 상대적으로 느린 기술발전)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지대론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적 농업에 대한 이론이다.

라이센스나 로열티 같은 것들이 잉여가치 중 일부를 특허권자나 저작권자가 전유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론이 그 지점에서 그친다면 거기에 큰 의미가 있을까. 오늘날 지적재산권의 적용범위는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고, 각국의 제도는 점점 동질화되어 가고 있다. 이제 기술개발은 경쟁우위를 확보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기업의 시장가치를 높이고 때로는 즉각적으로 상품화되어 판매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기술개발과 지식의 생산만을 목적으로 창업되는 기업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기업간 기술의 거래규모는 경제성장률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고, 국가 간 기술거래 규모 역시 확장되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금융화의 영향일 것이며, 금융화를 더 촉발시키고 있을 것이다. 이런 경향을 놓고 오늘날 우리는 지식경제시대 혹은 창조경제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주장도 있고, 그것은 표피의 변화를 과대평가한 것일뿐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주장도 있다. 등등등. 이러한 현대적인 현상들을 과연 어떻게 가치론의 구체적인 적용들을 통해 해명할 것인가. 이런 것에 소용이 없다면 가치론에는 대체 또 어떤 소용이 있겠는가.

(135) 번외편: 귀중한 역사유물론

이 글을 읽고 꽤 오랫 동안 책을 뒤적이면서 고민을 했다. 내 생각을 요약하면 이렇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은 전제가 아니라 결과다. 강신준 교수에게서처럼 변증법이 전제로 사용될 때 변증법은 정당화의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이런 내용으로 글을 쓰는 도중 문득 본회퍼의 ‘귀중한 은혜‘ (그의 ‘나를 따르라’에 수록되어 있다)라는 글이 떠올랐다. 곧장 패러디를 해야겠다는 예술적 갈망이 솟아났고 몇몇 주요한 단어들을 마르크스, 역사유물론 등등으로 바꾸는 것으로 충분했다.


귀중한 역사유물론

역사유물론을 값싸게 보는 우리의 견해는 마르크스주의의 대 원수임을 알아야 한다. 오늘 우리의 싸움은 역사유물론을 얻으려는 싸움이다. 값싼 역사유물론은 싸구려로 팔아버리는 상품과 같은 것으로, 억지로 내맡기는 자본주의의 극복이요 혁명이다. 무진장한 식료품 창고에서 물품을 내오듯이 생각 없이 마르크스주의에서 털어 내는 역사유물론을 뜻한다. 값도 댓가도 없는 역사유물론이다. 이것을 역사유물론의 본질이라 한다. 역사유물론은 이미 마르크스가 발견했기 때문에 언제나 공짜라는 것이다. 역사유물론을 이미 발견한 마르크스를 생각해서라도 무엇이나 거저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통찰이 엄청난 때문에 소비와 낭비도 엄청난 것이다. 꼭 인간의 실천을 필요로 한다면 그것이 과연 역사유물론인가? 싸구려 역사유물론이라 함은 교훈과 원리와 체계 같은 역사유물론을 말한다. 자본주의의 긍극적인 종말은 보편적 진리라 했다. 역사유물론은 인간사회의 근본적인 발전 원리이고 이념이라 했다. 이것이 사실임을 시인하는 자는 이미 자본주의를 극복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유물론을 소유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자는 그 이론이 흡족해할만한 옳은 마르크스주의자라 하였다. 세상은 자본주의를 극복하기를, 자본주의에서 해방되기를 애걸할 필요도 없다. 이런 종류의 역사유물론을 신봉하는 마르크스주의자로부터 자본주의의 폐해를 덮어 감출 뚜껑을 얼마든지 싸게 얻을 수 있는 때문이다. 그러므로 싸구려 역사유물론은 마르크스의 이론의 부정이며 인간이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간다는 마르크스의 역사관의 부정이다.

싸구려 역사유물론은 자본주의의 극복에 대한 것이요, 자본주의사회에서 생활하는 자본주의적 인간의 극복에 대한 것은 아니라 하였다. 역사유물론은 홀로 무엇이나 원만히 처리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모두 옛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도 좋다는 것이다. “여하간 우리의 행함이란 헛된 것이라” 하였다. 우리는 어쨌든 견고하게 구조화된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최선을 다해도 결국 자본주의를 벗어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자도 자본주의사회의 구조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다름 없이 살라. 모든 일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처리하고 역사유물론이 자연법칙으로 관철되도록 하기 위하여 자본주의적 생활 이상을 바라지 말라. 역사유물론을 저버리지 않도록, 거저 주어진 큰 역사유물론에 불만을 갖지 않도록, 부질없이 자본론 같은 것을 성실히 연구하거나 자본주의와 맞서 싸우는 활동에 몰두하여 주의주의와 인간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자본주의는 이미 역사유물론에 의하여 그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므로 – 이 역사유물론의 참됨을 위하여, 비할 데 없는 이 역사유물론을 배반하지 않기 위하여 –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여, 세상과 다름없이 살라. 비범한 일을 하고 싶은 것이 일반 인정이지만 비범한 생활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적 세상과 합하여 드러나지 않게 사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자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단념과 극기에 힘써 자신의 생활이 자본주의적 세상과 차별 없도록 하라는 것이다. 역사유물론을 역사유물론답게 지속하여 거저 받은 역사유물론에 대한 이론적 이해를 자본주의 세상에서 해소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자 자신의 세속성에 가해야 할 필요한 제재라는 것이니 이것은 세상, 아니, 역사유물론을 위한 것이며, 우리 의식 저편에서 도도히 흐르고 있는 역사유물론을 우리가 소유하게 된 것이며 생활의 위로며 안전이라 했다. 잘라 말해서 따라갈 필요 없이 앉은 자리에서 자본주의를 극복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과는 무관한) 역사의 자기실현을 뜻하는 싸구려 역사유물론일 수는 있어도 자본주의적 폐해와 악습을 극복하고 새로운 인간상을 만들어가는 것과는 무관하다. 자본주의의 극복이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싸구려 역사유물론은 우리 자신에 근원을 가진 우리 자신의 문제임을 잊으면 안 된다. 싸구려 역사유물론은 자본주의의 타도 없이 자본주의의 극복이 가능하다는 설교이며,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무시한 이론적 이해요,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한 뼈아픈 통찰 없는 정신 승리, 자각과 반성 없는 진보의 확인이다. 투쟁 없는 역사유물론, 고통 없는 역사 유물론, 자본주의 타도에 앞장성 이들을 애써 무시하는 역사유물론이 싸구려 역사유물론이라 하겠다.

그러나 귀한 역사유물론은 밭에 숨은 보물과 같다. 이 보물을 사려는 사람은 집에 돌아가 가진 전 재산을 기쁨으로 팔아 댓가로 지불한다. 장사군이 전 재산을 내어줄 수 있는 귀한 진주, 이것이 귀한 역사유물론이다. 인간의 비위를 거스르거나 놀라게 하는 역사의 진보의 흐름이 바로 역사유물론이요,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고 즉석에서 따라가게 하는 역사의 부름이 그것이다.

귀한 역사유물론은 계속해서 짓궂게 찾아야 할 이론이요, 간곡히 구해야 할 세계사적 이론이요, 두드려야 할 문이다.

역사유물론은 따라오라는 부름인 때문에 비싸고 역사의 진보의 길로 따라오라는 때문에 보물인 것이다. 역사유물론은 인간에게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에 비싸고 동시에 인간에게 진보를 선사하기 때문에 보물인 것이다. 비싸다 함은 자본주의를 저주하는 때문이요, 보물이라 함은 인간 하나하나의 가능성을 긍정하기 때문이다. 역사유물론이 비싼 이유는 무엇보다도 역사의 흐름을 좇는 사람들이 역사와 함께 흘린 피와 땀과 눈물 때문이요 – “학문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 마르크스에게 비싼 것이 우리에게 쌀 리 없는 것이다. 이같이 비싼 역사유물론이 보물임은 무엇보다도 역사가 우리와 함께 한다는 사실에 있다. 귀한 역사유물론은 바로 우리가 역사의 에이전트가 된 것을 뜻한다.

역사유물론이 귀함은 그것이 인류의 나아갈 길을 제시한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을 항상 주의하여 역사유물론을 개에게 던지지 않도록 해야 하며, 그것은 동시에 마르크스가 명료하게 제시한 것이므로 그의 뜻대로 말하도록 제한하지 않아야 한다. 역사의 진보의 길로 따라오라는, 자본주의의 극복의 길로 나서라는 부름은 우리를 감동시키며, 자본주의는 궁극적으로 패망할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확신에 찬 이론은 불안하고 지친 마음을 위로한다. 역사유물론이 비싼 것은 자본주의의 극복의 길에 널려 있는 멍에를 사람이 지도록 하는 때문이요 그것이 가슴뛰게 하는 것은 “피로를 두려워하지 않고 학문의 오솔길을 기어 올라”간다면 그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는 선례 때문이다.

역사유물론에 대한 깨달음이 마르크스에게 있어서는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그가 독일 이데올로기를 저술한 초창기의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후 자본론을 저술할 때 사용한 방식이다. 이 두 가지 방식은 하나의 총체의 계기들인 것으로 이러한 변증법적 사고가 이 학자의 전 생애를 감싸고 있다. 첫번째 것은 주로 경제학-철학 초고에 나타나는데, 그 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소외의 문제에 주목했다. 두번째 것은 자본론의 자본주의에 대한 체계적, 내재적 비판에 나타나는 것으로 여기서 관심은 인간의 아픔 그 자체 보다는 자본주의에 내재한 자기파괴적 성격에 대한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상호연관된 관점 사이에 역사의 진보를 따라가는 마르크스의 전 생애가 들어 있고 이 두 가지의 관점이 그의 생애를 감싸 주고 있다. 이 두 가지 관점의 중심에는 역사유물론에 대한 신념이 뚜렷이 솟아 있다. 즉 역사는 마침내 진보할 것이고 자본주의는 패망할 것이라는 고백인데 마르크스는 이 고백을 여러번 남겼다. 자본주의의 참상에 대한 즉각적인 분노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열정적이고 자기 희생적인 노력, 그리고 학적 연구를 통해 통찰하게 된 자본주의의 자기 파괴성은 같은 역사유물론의 두 가지 다른 모습일 뿐이다.

역사유물론은 마르크스에게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중 하나만을 취하고 다른 것을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역사유물론이 그에게 힘을 주어 마르크스로 하여금 모든 것을 버리고 진보의 길로 나서게 하였으며 온 세상이 신성모독이라 간주하는 이론을 세상에 내놓게 하였다. 이렇게 마르크스가 이해한 역사유물론은 비싼 것이었다.

사회의 진보에 대한 사상이 널리 전파되고 확대됨에 따라 세속화되고, 역사유물론은 비싼 면을 차차 상실하게 되었다. 세상은 진보의 이름 속에 보수화되고 역사유물론은 진보에 대한 신뢰라는 통속적 개념이 되어 버렸다. 싸게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일면이 아직 사회에 남아 있음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마르크스주의 전업운동가, 학자들의 존재가 곧 그것이다. 이들이 사회에서 제거되지 않았다는 것과 그것을 사회가 용납할 수 있다는 것은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자본주의의 극복에 비싼 값을 치루어야 하며 인내를 요구한다는 인식이 물론 사회의 진보적인 사람들의 한 변두리를 돌고 있음은 사실이나 이들의 생활의 핵심은 여하간 입신양명과 부귀안락의 가능성을 버리고 자본주의의 극복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엄격한 훈련을 닦는 일이었다. 전업운동가, 학자들의 존재는 역사유물론의 세속화와 이의 무력화에 대한 모진 항의이기도 하였다. 여기까지는 좋았으나 사회는 이 항의를 기뻐하였을 뿐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그와의 최후결렬은 면하였으나 그것을 상대화하게 되어 결국 이러한 생활은 진보운동의 세속화의 일종의 변명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즉 활동가로서, 혁명가로서, 학자로서의 삶은 특수 개인의 특수 행위로 인정받았을 뿐 사회 대중의 관심을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는 말이다. 역사유물론의 현실적 관철을 위한 노력을 특별한 취미의 인간들의 특별한 집단에 한정시킨 것은 숙명적으로 자본주의 극복을 위한 노력을 최고의 노력과 최저의 노력으로 나누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렇게 마르크스주의 전업활동가, 학자의 존재를 인정함으로 진보 세력은 세속화에 대한 항의를 피할 수 있는 길을 열었고 또 한편 아주 저급한 세속 생활의 가능성도 절대적 변호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들의 노력에 의하여 사회에 보관되고 있었던 역사유물론에 대한 저 충실한 이해는 자신을 다시 보수화된 진보진영에 변호해야 하는 결정적 모순에 떨어지고 말았다. 여하간 이러한 전업활동가, 학자들이 결정적 과오를 초래한 것은 – 역사유물론에 대한 내용적 오해는 차치하더라도 – 역사유물론의 길을 엄격한 따름의 길로 이해한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의 생활을 역사유물론에서 멀어지게 한 것은 자기 의사 결정에 따른 소수인의 특별 행위를 인정하고 이에 따른 특수 업적과 공로를 위한 상을 요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데 있다.

마르크스는 본래 학자의 길을 택했으며 그를 통해 순수하고 귀한 역사유물론이 일어났다. 그는 사회의 진보와 자본주의의 극복에 전념하는 학자가 되기 위해 많은 것을 버렸다. 세상을 버리고 역사를 진보하게 하는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그는 역사를 만드는 것은 인간이고 오직 이를 통해 사회가 진보한다는 것을 알았다. 노력을 통해서만 이 흐름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을 안 때문에 그는 밤낮없이 끊임없이 연구에 매진했다.

학자의 길을 택한 것은 삶 전체의 투기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 길은 역사유물론에 의하여 좌절당하고 말았다. 역사유물론을 따라감은 개인의 공을 쌓는 어떤 특수 행위가 아니라 자본주의 극복을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관철되어야 할 분명한 요구사항임을 그가 깨달은 때문이었다. 학자로서의 겸손한 행동은 훌륭한 다른 학자의 선례를 따르는 것이었다. 이것은 결국 모방하는 사람들 자신의 극기요 연구에 몰두하는 자들의 결정적 자기 주장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되자 세상은 학자들의 삶의 중추에 침투하여 위험한 일을 다시 시작하였다. 학자의 세계 도피는 아주 교활한 세계애가 된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러한 상아탑에서의 생활의 최후 가능성이 그에게서 좌절되자 역사유물론을 붙잡았던 것이다. 학자 세계의 붕괴 속에서 마르크스는 도리어 역사유물론의 섭리의 작동을 본 것이다. 그가 역사유물론을 붙든 것은 “개인은 아무리 이러한 관계들을 초월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그것들의 산물”이며 “경제적 사회구성의 발전을 자연사적 과정”으로 본 그가 그의 엄청난 개인적 노력의 허망함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얻은 역사유물론은 이렇게 비싼 것이었다. 그는 역사유물론에 투신하기 위해 그의 삶 전체를 꺾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 헤겔의 책을 버리고, 우선은 세계를 해석하고자 했던 그 생각을 버리고 역사유물론이 이끄는 길로 따라가야 했다. 이제는 학자로서의 자신의 공적을 위한 따름이 아니고 역사유물론의 흐름에 그 몸을 내맡기기 위한 것이었다. 자본주의는 끔찍한 것이나 결국 망하게 되어 있으니 네가 있는 곳에 그대로 있으면서 자본주의의 붕괴의 날을 기다리라는 깨달음은 마르크스의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오히려 안정적인 학자로서의 삶의 가능성을 버리고 자본주의 사회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선하고 정의로워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상아탑도 이와 다름이 없었던 때문이다.

학자의 길을 버리고 세상으로, 자본주의 사회로 돌이킨 마르크스의 길은 세상을 꾸짖은 힐책 중 가장 신랄한 공격을 뜻하였다고 본다. 세상의 길을 택한 마르크스의 세상에 대한 선전포고는 학자들의 세상에 대한 태도를 아이들의 장난으로 폭로시킨 것이다. 그의 싸움은 백병전이었다. 자본주의의 극복을 생활의 중심에 세워 놓은 것이다. 특수한 환경 속에서 특수한 사람들의 역할과 책임으로 간주되었던 일들이 이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피할 수 없는 명령이 되었다. 역사유물론을 따른다는 것이 일상적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예측할 수 없을 만큼 깊어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세상과 몸을 맞댈 수 밖에 없다. 이것을 백병전이라 한다. 마르크스의 이론, 특히 역사유물론을 순수한 학적 연구의 결실이라 하여 더 이상의 이론적, 실천적 노력/투신의 면제를 세상에 선포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불행한 오해라 하겠다. 역사유물론의 발견, 곧 자본주의의 필연적 패망의 이론의 선포는 자본주의에 대한 정당화도 그것의 긍정도 아니다.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자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의 행동에 의한 자본주의적 세상에의 항의가 아주 날카로울 때 한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생활을 역사유물론을 따르는 방식으로 수행할 때 그의 생활은 정당화될 수 있다.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사람을 정당화하려는 것이 – 왜냐하면 사람은 역사유물론의 부름에 응답할수 있으므로 – 상아탑의 길을 포기한 마르크스의 목표라 하겠다. 마르크스는 역사유물론을 비싼 값을 주고 산 것이다. 메마른 땅의 생수며 공포에 대한 위로요, 스스로 택한 노예 생활에서의 해방이며, 모든 자본주의적 패악의 소멸을 뜻하는 때문에 그것은 보물인 것이다. 이 보물은 책임을 불문에 붙이지 않고 오히려 따라오라는 부름을 극도로 날카롭게 하는 때문에 비싼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비싼 점에서 보물은 보물이요, 보물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비싼 것이다. 이것이 반자본주의자의 이론의 비의요, 인간을 그가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임에도 변호할 수 있는 비의인 것이다.

그런데도 이 승리적 유물은 귀하고 비싼 보물이라는 마르크스적 인식이 아니라 인간의 세속적, 자본주의적 본능에 권리를 만들어주는 결과가 되고 역사유물론은 그로 인하여 점차 싸구려로 전락해 갔다. 이러한 본의 아닌 결과는 극히 적은 잘못된 액센트에 따른 것으로 말하자면 이 적은 과오가 가장 위험하고 저주스러운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경건한 생활과 일에서 세상의 진보 그 자체보다는 자기 자신을 찾는 때문에 마르크스는 그러한 개인적 노력만으로는 자본주의적 극복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쳤던 것이다. 이러한 숙명 속에서 마르크스는 인간의 역사를 자연사적 과정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동시에 마르크스는 이러한 자연사적 과정으로서의 자본주의의 극복이 생명의 대가라는 것과 그리고 이를 위하여 아직 날마다 생명을 지불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역사유물론이라는 이론에 의하여 인간의 노력이 면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이 이 이론을 통해 비로소 올바른 노력으로 자리매김되는 것이었다. 역사유물론에 대한 마르크스의 언급 배후에는 언제나 엄청난 노력을 통해 역사유물론이 제시하는 길을 따라가려 하였던 그의 생활이 밑받침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본주의의 타도를 위한 노력과 역사유물론은 하나였다. 자신의 모든 생활 행위 속에서 그는 역사유물론의 도도한 흐름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제자들도 마르크스의 이론을 그대로 되풀이하였다. 그러나 시간 경과에 따라 단 하나의 차이가 그들 사이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즉 마르크스에게 가장 자연스러웠던 자본주의 극복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후계자들은 빼놓고 만 것이다.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 이해에는 인간이 역사를 만들어간다는 점이 그 중심까지 스며들어 있어 인간의 노력의 중요성을 꼬집어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후계자들의 이론이 마르크스에게서 온 것임은 의심할 바 없으나 그의 역사유물론이 비싼 보물이었다면 이의 본의 상실은 이미 마르크스의 제자들 중에 깃들었다고 볼 것이다. 인간의 역사를 자연사적 과정으로 파악하고자 하였으며, 그리하여 개인을 사회의 산물로 간주하는 마르크스의 이론이 (이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한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자본주의의 역사적 정당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까지 나아가게 된 것이다. 비싼 역사유물론이 인간의 행위와 노력을 무시하는 싸구려 역사유물론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개인은 주관적으로는 아무리 이러한 관계들을 초월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그것들의 산물이다”라고 말하는 순간에도 마르크스는 역사유물론에 투신하라는 부름에 접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공부하고 깨닫는 것은 자신의 잘못된 생활을 결정적으로 끊는 일이지 결코 그 생활의 변명을 뜻할 수는 없다. 그것은 개인적 주장과 선호를 사회의 진보라는 대의에 맞추어나가기 위해 끊어내는 최후 선언을 위한 것이다. 자본주의의 붕괴는 ‘결과’적으로 자연사적 과정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후계자들에 의하여 추리의 원리를 위한 전제가 되어 버렸다. 모든 불행은 여기에 있다. 자본주의의 자동붕괴를 인간의 행위와 노력의 ‘결과’로 보았던들 이러한 불행이 초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에 기인하는 자본주의의 궁극적 자기파괴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전제로 본 때문에 그것은 자본주의적 이념에 부합한 생활을 이롭다하는 나의 기정 소유물이 되고 만 것이다. 이때 내가 이 이론에 힘입어 자본주의적 생활에 영합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이 이미 원리적으로 자본주의를 극복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전히 시민적이며 세속적인 생활에 그대로 머물러 모든 옛 것을 그대로 행하여도 좋으며 이론이 도리어 이러한 생활을 지지한다는 확신에 이른 것이었다. 이 이론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는 진보적인 사회로 화하고 마르크스주의는 이 이론 속에서 전대미문적으로 보수화하였다. 이렇게 마르크스주의적 이론과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일상적 생활간의 갈등은 해소되었다. 마르크스주의적 삶이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자본주의와 함께 살며 자본주의와의 차이를 어떤 점에서도 두지 않고 – 그렇다 이론을 위해서라도 나를 자본주의로부터 구별해서는 안된다 – 그때 그때 자본론을 읽으며 자본주의의 궁극적 붕괴의 확실성만을 되풀이하며 얻으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는 인간성에 대한 가장 무서운 적인, 참 인간성을 증오하고 멸시하는 싸구려 역사유물론에 의하여 자본주의 극복에 투신해야 한다는 필요와 의무에서 해방된 것이다. 가설은 싸구려다. 이론이 한 가설 구실밖에 못할 때 그것은 싸구려가 되어 버린다. 그 대신 결과로서의 이론은 무한히 비싼 것이다. 하찮은 표현의 차이가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의 진리를 이렇게 좌우하는 것을 생각하면 가공할 일이다. 자본주의가 그 모순으로 인해 마침내 자동붕괴할 것이라는 이론은 결과로서의 이론으로 옳다. 그러나 이같은 문구의 오용은 그것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파괴해 버린다.

파우스트가 무엇을 알아 보려고 일생 동안 노력한 끝에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였을 때, 이 말은 그의 전생애적 노력의 결과이다. 가령 이 같은 말을 대학 신입생이 이용한다면 그 뜻은 전혀 달라질 것이다 (키에르케고르). 결과로서의 이 말은 진리요, 전제일 때 자기 기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실생활에서 얻은 인식을 생활에서 분리할 수 없음을 뜻한다.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역사유물론이 제시하는 길을 따르는 사람만이 오직 이 역사유물론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이 부름을 역사유물론으로, 역사유물론을 부름으로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역사유물론의 혜택으로 오히려 자본주의의 부정을 모면하려는 자는 스스로 속는다.

그러나 이를 완전히 전도시킬 위험한 지점에 마르크스 자신도 빠져 들지 않았던가? 즉 “사회적 노동생산력의 발전은 자본의 역사적 과제이며 그것의 역사적 정당성이다. 바로 이를 통해서 자본은 무의식중에 더욱 고도의 생산형태를 위한 물적 조건을 창출한다. …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 생산력의 발전을 저지하게 된다면 자신의 역사적인 소명에 불성실한 것이 된다.”고 한 마르크스의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너는 이미 자본주의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거기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니 학자이건 혁명가이건 아니면 마르크스주의에 호의를 갖고 있는 사람이건, 자본주의의 극복을 원하건 유지를 원하건 자본주의의 올가미에서 벗어 나오기는 틀렸으며, 이렇든 저렇든 자본주의와 더불어 그 패악에 참여할 것이니 어차피 그럴 바에야 차라리 – 게다가 자본주의는 어차피 결국 망할 것인데 – 용감하게 주저하지 말고 효용과 이윤을 극대화하며 살아가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이론은 싸구려가 되고 면죄부가 되고 인간성은 해체되고 말 것이다. 이론은 이때 인간성의 파괴에 필요한 용기의 근원이 되지 않는가? 마르크스가 우리에게 전해준 역사유물론을 핑계삼아 이러한 자해를 저지르는 것보다 더 반마르크스주의적인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이것을 반마르크스주의적인 것으로 보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태도는 옳은 견해가 아닐까?

옳게 이해하는 관건은 결과와 전제의 차이를 뚜렷하게 하는 데 있다. 마르크스의 이 말이 소위 자본주의의 역사적 정당성의 전제가 되면 싸구려 역사유물론의 논리가 선포된다. 그러나 처음이 아니라 끝으로, 결과로, 마지막 돌로, 최후의 말로 보면 마르크스의 이 말은 옳게 이해된다. 전제가 될 때, “자본의 역사적 과제”는 윤리적 당위가 되고 이론의 본질은 이 윤리적 당위와 일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정당화다. 마르크스의 글은 이 때 그가 생각한 것과는 정반대가 되어 버린다. “자본의 역사적 과제”, 이 말은 마르크스의 최후적 탈출구였으며 결국 극한의 개인의 노력에 드리워져 있는 허망함을 안 그가 이 허망함에 좌절하여 결국 포기 외에 다른 길을 찾아내지 못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말이었다. 마르크스의 이 말은 자본주의가 주는 안락과 평화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길이 없어 보이는 곳에 다다랐을 때 마침내 역사가 그 얼굴을 드러낸다는 이론적 낙관주의이다. 자본주의의 장점을 보는데 과감하라. 자본주의에서 도망하는 대신 자본론을 읽으며 정신을 가다듬어라. 우리는 결코 자본주의의 사슬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오늘도 너는 벗어날 수 없는 멍에를 지고 있는 너는 너 이상 다른 것이 되려고 하지 말라. 그렇다. 날마다 다시 자본주의에 사로 잡히고 포로로서 용감하라. 그러나 누구에게 이런 말이 해당할 것인가? 이 말이야말로 항상 충실히 자본주의와 싸우고 역사유물론을 따라가는 데 지장이 되는 모든 방해물에 날마다 항의하는데도 사라지지 않는 장애물과 능력의 한계로 불안해 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겠는가? 이론의 위태함을 느끼지 않으면서 누가 감히 이 말을 들어 이해할 수 있을까? 이 말이 주는 위로를 통하여 다시금 기운을 얻고 역사의 진보를 향한 출발을 새로 다짐하는 자가 아니겠는가? 마르크스의 이 문구를 이렇게 결과로 이해할 때에만 역사유물론은 귀한 역사유물론이 될 것이다.

장을 달리하여, 이론에 공허를 느끼고 고민하는 사람을 위하여 이 사실을 다시 되풀이하겠거니와 특히 싸구려 역사유물론으로 인해 인간의 치열한 노력의 길을 잃고, 이 이론에 대한 이해까지도 잃어버린 것을 고백하는 사람을 위하여 이 사실을 성실히 그리고 솔직히 다루어 보고자 한다. 여기에 우선 요약하면 우리는 올바른 이론을 가진 사람일지는 모르나 그 이론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에 맞추어 행동하는 사람들이 아닌 것을 부인할 수 없는 때문에, 결과로서의 역사유물론과 자본주의의 극복을 위한 인간의 노력 사이의 상호관계를 바로 이해하는 노력을 다시 해보자는 이 과제는 오늘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고민이 우리에게 점점 명백히 보여 주는 것은 마르크스를 따르는 사람들의 실생활에 대한 자세의 문제이다.

우리 자신의 길 마지막에 서서 사실 파악할 수 없는 것, 즉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은 순수하고 이것은 결과로서의 자연사적 과정인 덕분에 귀한 것이라는 사실을 파악한 자들에게는 복이 있다 할 것이다. 역사유물론에 대한 신뢰로 자신을 극복하고 겸손하고 묵묵하게 인류를 진보의 길로 이끄는 자들에게는 복이 있을 것이다. 이것을 인식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생활에서 이 인식을 지키고, 역사유물론을 따라감으로 자본주의의 극복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어 세상 생활에 사실 자유한 자들에게는 복이 있을 것이다. 역사유물롬을 따름이 사회의 진보에 대한 확신에 뿌리내린 생활임을 알기 때문에 역사유물론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복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 역사의 흐름 속에 함께하며 역사의 축복을 받은 자들에게는 복이 있을 것이다.

(134) 변증법적 유물론, 유물론적 변증법

다윈은 자연의 기술사, 즉 동식물의 기관들 – 동식물의 생활의 영위를 위한 생산도구들이다 – 의 형성(Bildung)에 관심을 기울였다. 사회 속 인간들(Gesellschaftsmenschen)의 생산적 기관들의 형성사, 모든 특수한 사회조직체(Gesellschaftsorganisation)의 물적토대의 형성사에도 동일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것이 더 용이하게 수행될 수 있지 않을까? 비코(Vico)의 말대로 인간의 역사는 자연사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 인간의 역사는 우리가 만들어낸 것인 반면 후자는 그렇지 않다. 기술(Technologie)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능동적 행동(Verhalten), 즉 인간 생활의 직접적 생산과정을,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사회적 생활조건(Lebensverhältnisse)과 그로부터 생겨나는 정신적 표상들(Vorstellungen)을 밝혀준다. 심지어 어떤 종교사도 이러한 물적토대를 추상하는한 몰비판적이다. 사실 분석을 통해 종교적 환영들(Nebelbildungen)의 현세적 핵심을 찾아내는 것이 거꾸로 현실의 생활조건들로부터 그것들의 신성화된(verhimmelten) 형태를 전개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후자가 유일하게 유물론적인 따라서 학적인 방법이다. 역사적 과정을 배제하는 추상적인 자연과학의 유물론의 약점은 이들의 대변자들이 자신들의 전문분야를 벗어나자마자 사용하는 추상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개념들(Vorstellungen)로부터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자본론 1권 15장; MEW 23, 392

참고: 기존의 번역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새롭게 번역했다 (아래 비봉판, 길판, 펭귄판, MIA판 번역 참조)

1. 기술을 – 그리고 기술의 구현체인 도구와 기계를 – 기관에 비유한 것이 인상적이다. 특수한 동식물의 종별성이 기관구조의 종별성에 있다면 어떤 사회조직체의 종별성을 기술과 도구의 종별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에서 “손절구는 봉건영주가 있는 사회를 산출하고, 증기 제분기는 산업 자본가가 있는 사회를 산출할 것이다”(마르크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273)라고 썼다. 하지만 자립적으로 발전하는 생산기술 혹은 생산력이 생산관계, 생산양식을 변화시킨다는 식의 해석은 곤란하다. 생산력의 발전 역시 사회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2. “사회 속 인간들의 생산적 기관들의 형성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생산적 기관들의 형성사가 생산양식과 사회적 관계들의 형성사의 중요한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관계들은 생산력들과 밀접하게 연관 되어 있다. 새로운 생산력을 획득함으로써 인간들은 그들의 생산 양식을 변화시키며, 그들의 생산 양식, 생계를 유지하는 방식을 변화시킴으로써 인간들은 그들의 모든 사회적 관계들을 변화시킨다” (철학의 빈곤, 앞의 책, 273)

3. 비봉판에는 “기술학”, 길판에는 “공학”으로 번역되어 있는 Die Technologie는 그냥 기술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다.

4. (어떤 특정한) 기술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드러낸다:

  • [자연에 대한 인간의 능동적 행동(Verhalten) = 인간 생활의 직접적 생산과정] – 사용가치의 관점에서의 기술
  • [인간의 사회적 생활조건(Lebensverhältnisse)] –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보자면) 가치의 관점에서의 기술
    • Lebensverhältnisse는 보통 생활수준으로 번역하지만 여기서는 생활조건으로 번역했다. 이 단어가 단순히 물질적/문화적 생활수준을 넘어 사회적 삶의 조건을 규정하는 사회적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비봉판과 길판에는 모두 “생활 … 관계들”로 되어 있는데 – 아마도 Verhältnisse를 보통 관계로 번역하기 때문일 것이다 –  생산력의 의미가 배제되어 있다는 아쉬움이 있다.
    • 생산기술은 협업의 방식을 규정하고, 역으로 (생산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지배적인 협업의 방식을 반영한다. 기계는 생산성을 높일 뿐만 아니라 노동자를 생산의 보조자로 전락시키는데, 이것은 노동자들의 비숙련화를 전제로 한다.
  • 인간의 사회적 생산조건으로부터 생겨나는 정신적 표상들(Vorstellungen) – 다시 한번 [철학의 빈곤]에서 인용
    •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성에 조응하여 사회적 관계들을 확립하는 바로 그 인간들이 또한 그들의 사회적 관계들에 조응하여 원리들, 이념들, 범주들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이 이념들, 이 범주들은 그것들이 표현하는 관계들과 마찬가지로 영원하지 않다. 그것들은 역사적이고 과도적인 산물들이다.
      생산력들 속에는 끊임없는 성장의 운동이, 생산 관계들 속에는 끊임없는 파괴의 운동이, 이념들 속에는 끊임없는 형성의 운동이 존재한다 ;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운동의 추상뿐이다 – 불사의 사.” (철학의 빈곤, 앞의 책, 273, 강조는 원문)

5. 행동(Verhalten)이라는 표현은 비슷한 맥락에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도 사용된다 – “인간들의 표상함, 사유함, 정신적 교류는 여기에서 또한 그들의 물질적 행위(Verhalten)의 직접적 유출로서 나타난다” (독일 이데올로기, 앞의 책, 201)

6. 환영들로 번역한 Nebelbildungen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안개의 형성이다. 영어로는 보통 Phantom이라고 번역한다. 자본론 1권 1장 4절의 상품물신주의에 관한 절에서 마르크스는 비슷한 의미를 갖는 두 개의 단어를 사용한다. 하나는 phantasmagorische (환영과 같은, 환상과 같은)이고, 다른 하나는 Nebelregion (안개영역 – 비봉판에는 “몽롱한 … 세계”, 길판에는 “신비경”으로 번역되어 있다)이다.

노동생산물의 상품형태와 가치관계는 … 인간의 눈에는 물건들 사이의 관계라는 환상적인(phantasmagorische)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사실상 인간들 사이의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위해 우리는 몽롱한 종교세계(Nebelregion der religiösen Welt)로 들어가 보지 않으면 안된다 – 자본론 1권 1장, 93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도 Nebelbildungen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인간들의 뇌 속의 환영들(Nebelbildungen) 또한 인간들의 물질적인, 경험적으로 확인 가능한, 그리고 물질적 전제들에 연결된 생활 과정의 필연적 승화물이다. – 독일 이데올로기,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202

[철학의 빈곤]과 [독일 이데올로기]의 이 부분들만 놓고보면 유물론에 대한 마르크스의 생각은 1846년 이래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독일 이데올로기에는 “유일하게 유물론적인 … 방법”에 대한 다음과 같은 언급도 있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독일 철학과는 정반대로 여기에서 우리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다. – 독일 이데올로기, 같은책, 202-3

7. 과학적 방법 대신 학적 방법이라는 표현이 낫다. 학회의 주제를 정하고 제출된 논문을 심사하는 Scientific Committee를 과학적 위원회로 번역할 수 없는 것 아닌가.

8. 추상적인 자연과학의 유물론이라 함은 곧 기계적 유물론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 유물론은 역사적 과정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추상적이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대상의 고정성을 부정하는 유물론이다. 그것은 현실이 끊임없는 변화 속에 놓여 있다고 간주한다는 점에서 변증법적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그리고 그의 변증법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출발해 하늘로 올라간다는 점에서 유물론적 변증법이다.

이 고찰 방식은 현실적 전제들에서 출발하여, 그 현실적 전제들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다. 이 고찰 방식의 전제들이란 어떤 환상적 (phantastisch) 격리와 고정 속에 있는 인간들이 아니라, 특정한 조건들 아래의 현실적인, 경험적으로 일목요연한 발전 과정 속에 있는 인간이다. 이러한 활동적 생활 과정이 표현되자마자 역사는, 경험론자들 – 그들 자신 아직 추상적인 – 의 경우처럼 죽은 사실들의 집적이기를 멈추고, 혹은 관념론자들의 경우처럼 상상된 주체들의 상상된 행동이기를 멈춘다. – 독일 이데올로기, 같은책, 202

독일어 원문

Darwin hat das Interesse auf die Geschichte der natürlichen Technologie gelenkt, d.h. auf die Bildung der Pflanzen- und Tierorgane als Produktionsinstrumente für das Leben der Pflanzen und Tiere. Verdient die Bildungsgeschichte der produktiven Organe des Gesellschaftsmenschen, der materiellen Basis jeder besondren Gesellschaftsorganisation, nicht gleiche Aufmerksamkeit? Und wäre sie nicht leichter zu liefern, da, wie Vico sagt, die Menschengeschichte sich dadurch von der Naturgeschichte unterscheidet, daß wir die eine gemacht und die andre nicht gemacht haben? Die Technologie enthüllt das aktive Verhalten des Menschen zur Natur, den unmittelbaren Produktionsprozeß seines Lebens, damit auch seiner gesellschaftlichen Lebensverhältnisse und der ihnen entquellenden geistigen Vorstellungen. Selbst alle Religionsgeschichte, die von dieser materiellen Basis abstrahiert, ist – unkritisch. Es ist in der Tat viel leichter, durch Analyse den irdischen Kern der religiösen Nebelbildungen zu finden, als umgekehrt, aus den jedesmaligen wirklichen Lebensverhältnissen ihre verhimmelten Formen zu entwickeln. Die letztre ist die einzig materialistische und daher wissenschaftliche Methode. Die Mängel des abstrakt naturwissenschaftlichen Materialismus, der den geschichtlichen Prozeß ausschließt, ersieht man schon aus den abstrakten und ideologischen Vorstellungen seiner Wortführer, sobald sie sich über ihre Spezialität hinauswagen. – MEW 23, 392

비봉판

다윈(Darwin)은 자연의 기술사 [즉, 생명의 유지를 위해 생산도구의 역할을 하는 동식물의 기관들의 형성]에 관심을 돌리고 있었다. 인간사회의 생산적 기관의 형성사[즉, 모든 사회조직의 물질적 기초가 되고 있는 기관의 형성사]에도 그와 동일한 주의를 돌릴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은 더 용이하게 저술할 수 있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비코(Vico)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의 역사는 우리가 만들었지만 자연의 역사는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양자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기술학은 인간이 자연을 다루는 방식,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생산과정을 밝혀 주는 동시에, 인간생활의 사회적 관계들과 이로부터 발생하는 정신적 관념들의 형성과정을 밝혀 준다. 이 물질적 기초를 사상하고 있는 모든 종교사는 무비판적이다. 안개처럼 몽롱한 종교적 환상의 현세적 핵심을 분석에 의해 발견하는 것은, 현실의 생활관계들로부터 그것들의 천국형태를 전개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쉬운 일이다. 후자의 방법이 유일하게 유물론적인, 따라서 유일하게 과학적인 방법이다. 자연과학의 추상적 유물론(즉, 역사와 역사적 과정을 배제하는 유물론)의 결함은, 그 대변자들이 일단 자기의 전문영역 밖으로 나왔을 때에 발표하는 추상적이며 관념론적인 견해에서 곧 드러난다. – 501

길판

다윈은 자연의 기술사, 즉 동식물이 자신들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생산용구로서 자신들의 갖가지 기관을 어떻게 형성해왔는가에 관심을 기울였다. 사회적 인간의 갖가지 생산기관의 형성사나 각 개별 사회조직의 물적 토대에 의한 형성사도 마찬가지로 관심을 기울일 만한 분야 아닐까? 그리고 사실 이 분야가 더 쉬운 분야가 아닐까? 왜냐하면 비코(Vico)의 말대로 인간의 역사와 구별되는 까닭은, 전자는 우리가 만든 것이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공학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능동적인 태도, 즉 인간생활 [따라서 인간생활의 온갖 사회적 관계와 거기에서 생겨나는 정신적 표상들]의 직접적인 생산과정을 밝혀주고 있다. 이 물적 토대를 무시한다면, 어떤 종교사도 몰비판적인 것이다. 분석을 통해 종교적 환상의 현세적인 본질을 찾아내는 것은, 거꾸로 그때그때 현실의 온갖 생활관계들에서 그것의 종교적인 형태를 설명해내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다. 후자가 곧 유물론적인[따라서 과학적인] 방법이다. 역사적 과정을 배제하는 추상적, 자연과학적 유물론의 결함은 그 대변인들이 자신들의 전문영역을 벗어나자마자 보여주는 추상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견해에 의해 분명히 드러난다. – 508

펭귄판

Darwin has directed attention to the history of natural tech­nology, i.e. the formation of the organs of plants and animals, which serves as the instruments of production for sustaining their life. Does not the history of the productive organs of man in society; of organs that are the material basis of every particular organization of society, deserve equal attention? And would not such a history be easier to compile, since, as Vico says; human history differs from natural history in that we have made the former, but not the latter? Technology reveals the active relation of man to nature, the direct process of the production of his life, and thereby it also lays bare the process of the production of the social relations of his life, and of the mental conceptions that flow from those relations. Even a history of religion that is written in abstraction from this material basis is uncritical. It is, in reality, much easier to discover by analysis the earthly kernel of the misty creations of religion than to do the opposite, i.e. to develop from the actual, given relations of life the forms in which these have been apotheosized. The latter method is the only materialist, and therefore the only scientific one. The weaknesses of the abstract materialism of natural science, a materialism which excludes the historical process, are immediately evident from the abstract and ideological conceptions expressed by its spokesmen whenever they venture beyond the bounds of their own speciality. – 493-4

MIA판

Darwin has interested us in the history of Nature’s Technology, i.e., in the formation of the organs of plants and animals, which organs serve as instruments of production for sustaining life. Does not the history of the productive organs of man, of organs that are the material basis of all social organisation, deserve equal attention? And would not such a history be easier to compile, since, as Vico says, human history differs from natural history in this, that we have made the former, but not the latter? Technology discloses man’s mode of dealing with Nature, the process of production by which he sustains his life, and thereby also lays bare the mode of formation of his social relations, and of the mental conceptions that flow from them. Every history of religion, even, that fails to take account of this material basis, is uncritical. It is, in reality, much easier to discover by analysis the earthly core of the misty creations of religion, than, conversely, it is, to develop from the actual relations of life the corresponding celestialised forms of those relations. The latter method is the only materialistic, and therefore the only scientific one. The weak points in the abstract materialism of natural science, a materialism that excludes history and its process, are at once evident from the abstract and ideological conceptions of its spokesmen, whenever they venture beyond the bounds of their own speciality.

 

(133) 비판적인 기술사

이미 왓트(Wyatt) 이전에도 매우 불완전한 것일지언정 방적기가 – 아마도 최초로 이탈리아에서 – 사용되고 있었다. 비판적인 기술사는 18세기의 발명 중 한 개인의 업적으로 된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 자본론 1권 15장, 501; MEW 23, 392

안타깝게도 마르크스는 비판적인 기술사(Eine kritische Geschichte der Technologie; a critical history of technology)에 관해 상술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에 비판적 기술사에 대한 내 해석을 간단히 정리해보려고 한다.

1. “비판”은 다음의 구절에서와 같은 용법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상품에 포함된 노동의 이러한 이중적 성질을 비판적으로 지적한 [heesnag: 입증한] 것은 내가 처음이다 – 자본 1권 1장, 96 (길판), 강조 추가

Diese zwieschlächtige Natur der in der Ware enthaltenen Arbeit ist zuerst von mir kritisch nachgewiesen worden – MEW 23, 56

마르크스가 노동의 이중성의 발견을 그의 가장 중요한 공헌으로 간주했음을 감안하면, “비판적으로”라는 표현에 상당한 무게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EM님이 지적했듯이 비판은 부정적이라기 보다는 긍정적인 개념이다.

그렇다면 ‘비판’ 이란 무엇인가? 흔히 분석을 긍정적인 것으로, 비판을 부정적인 것으로 여기는데, 어원적으로 보든 아니면 그 개념이 실제 지성사에서 쓰인 방식으로 보든 ‘비판’이란 부정적이기보다는 긍정적인 개념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어원적으로 ‘비판’(critique)이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로까지 소급되는데, 이때 그것은 ‘위기’(crisis)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crisis란 일종의 의학용어라고 할 수 있는데, 환자의 병세가 하나의 국면에서 다른 하나의 국면으로 넘어가는 어떤 고비 같은 것을 뜻했다고 한다. 당연하게도, 이런 의미에서 crisis는 사태에 대한 면밀한 ‘분석’은 물론 그에 기반해서 내려질 냉철한 ‘판단’까지도 포괄하게 되는데, 이후 이런 ‘분석’이나 ‘판단’의 문제는 대체로 critique이라는 단어로 독립되었다. 나아가 critique은 코젤렉(Reinhart Koselleck)이 밝힌 바 있듯이 근대 서유럽 지성계에서 심지어 ‘이성(reason)의 사용’ 일반을 가리키는 용어로까지 발전하기에 이른다.

물론 그렇다고 ‘비판’에 부정적인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시 이 말의 어원을 보자. 그것은 crisis와 맥을 같이 한다고 했고, 그런 의미에서 ‘비판’이란 비판 대상이 일정한 ‘위기’ 상황에 있다는 판단을, 나아가 그런 판단을 가능케 하는 그 대상에 대한 합리적인 ‘분석’을 전제한다고 했다. 예컨대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을 비판하겠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현재 정치경제학이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하는 것이며, 이런 판단을 설득력 있게 내어놓으려면 정치경제학을 면밀히 파헤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후자의 작업은 필연적으로, 그 자신 하나의 정치경제학 체계를 결과로서 내놓을 텐데, 우리는 그 결과를 《Das Kapital》이라는 형태로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이 《Das Kapital》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기존 정치경제학을 지양하기 위한 것이지 그 자체로 또 다른 정치경제학이기를 지향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반대로, 비판적이지 않은 경제학, 과학적이지 않은 경제학이 현실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이렇게 진정으로 비판적이고 과학적인 경제학을 내놓고 증진시키며 예의 그 잘못된 경제학에 그것을 대비시키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비판적’인—‘부정적’ 의미에서의—기획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What’s in a name? 자본론 vs 자본: ‘비판’의 의미에 대하여, 강조는 원문

기존의 기술사가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하는 것”에서 출발하고, 이를 “면밀히 파헤치”는 것을 통해 “필연적으로” 새로운 기술사 체계 – 비판적인 기술사 – 를 “결과로서 내놓”을 수 있겠다.

2. 그런 측면에서 “18세기의 발명 중 한 개인의 업적으로 된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라는 언급에는 이미 비판적인 기술사의 싹이 담겨 있다. 이것은 우선 발명을 개인의 (천재성의) 산물로 이해한 당대의 보편적 이해에 대한 부정적 비판이지만, 동시에 과학기술의 사회적 성격 – 과학기술은 사회적 산물이며 동시에 사회의 규정적 요소이다 – 에 대한 마르크스의 인식을 보여준다.

3. 당연하게도,

현재까지는 그와 같은 저술은 아직 없다.

마르크스 당대에도 없었으며 현재에도 (별로) 없는 것 같다. 마르크스주의적 STS (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이론은 노동과정론과 인지자본주의론 정도를 들 수 있는데, 전자는 만족스럽지 못하고 후자는 잘못된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여담이지만 석사 혹은 박사과정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Sussex 대학의 Science and Technology Policy Research (SPRU)을 택할 것 같다.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인 알란 프리만(Alan Freeman)의 더 유명한 아버지인 크리스 프리만(Chris Freeman)이 맹활약한 곳이다. 여기서 “마르크스의 비판적 기술학”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쓴다면 꽤 근사하지 않을까. 혹시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에 대한 전문적 연구에 관심 있는 분이 있다면 이런 루트를 추천드리고 싶다.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연구에서 전형 논쟁, 오키시오 정리와 같은 기술적인 주제들이 과대평가되는 것을 나는 항상 안타깝게 생각했다. 나름 의미 있는 주제들이라는 것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비판적 자본주의 이론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전형과 오키시오 정리 에 대한 연구가 기여할 수 있는 바는 많지 않다. 긴요한 것은 마르크스 가치론의 정합성에 대한 증명이 아니라, 비판적 이론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다. 비판적 기술학, 비판적 교육학, 비판적 예술학, 비판적 정치학 등등등등.

아.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