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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경제학적 설명과 역사적 요소

수학자와 기계학자는 – 약간의 영국 경제학자들도 그런 말을 모방하고 있지만 – 도구는 단순한 기계이고, 기계는 복잡한 도구라고 설명하고 있다 … 그러나 경제학적 입장에서는 그러한 설명은 아무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그 설명에는 역사적 요소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 자본론 1권 15장, 500; MEW 23, 492

어떤 설명이 경제학적 의의를 갖기 위해서는 역사적 요소를 포함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이상하게 들린다. (상품관계에 바탕을 둔) 경제학적 설명이 일반적으로 질적 차이를 사상하고 모든 것을 수치화하는 반면, 역사적 설명은 연속성보다는 질적 변화와 구분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경제학적 설명은 역사적 요소를 포함해야 하기는 커녕 오히려 배척해야 하는 것 같다.

이것은 경제를 고유한 논리를 갖는 하나의 독자적이고 자립적인 영역으로 이해하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이에 따르면 경제적 논리는 수치화하는 논리, 효율화하는 논리, 개별성과 사익을 강조하는 논리이며, 경제적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의 영역이 바로 경제다. 사회는 필연적으로 경제의 영역과 비경제의 영역으로 분할되며, 경제적 논리는 비경제적 논리와 대립하고 경쟁한다. 여기서 공세를 취하는 것은 물론 경제다. 경제영역은 비경제영역을 하나하나 복속해 나가고 (민영화, 규제완화, 자유무역협정), 경제논리로 비경제영역의 작동원리를 해명하는 방식으로 계몽을 시도하며 (인적자본론, 조폭 경제학), 그것이 어느 정도 한계에 도달한 이후에는 비경제영역을 경제논리의 산물인 것처럼 이론화하여 적군을 아군으로 만드는 (신제도주의 경제학) 정신승리의 단계에까지 나아간다.

경제의 가열찬 공세는 그 한계를 모른다. 고리타분하고 비효율적이며 현상유지에 급급한 비경제의 영역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의 경제의 투쟁은 계속된다. 이러한 세계관에 역사의 자리가 있다면 그것은 GDP로 표현되는 ‘양’의 역사 뿐이다. 기계와 도구 사이의 허다한 질적 차이는 ‘양’의 용광로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마르크스의 경우에는 경제적 논리와 비경제적 논리가 외적으로 대립하는 대신 내적 (대립 속의) 통일을 이루고 있다. 우선 종적으로 경제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회적 지배관계(즉, 비경제)의 존재양식이다. 횡적으로는 공공부문, 가정 등과 같은 비경제영역은 경제영역과 마찬가지로 이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회적 지배관계의 원활한 재생산을 위한 도구로서 기능한다. 그래서 경제영역의 무차별적 확장보다는 경제영역과 비경제영역 사이의 적절한 분할선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 우리는 이 사실을 경제위기를 통해 재확인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경제학적 입장”에 입각한 설명에서는 역사적 요소가 빠질 수 없다. 첫째, “경제학적 입장” 그 자체의 역사성의 측면에서 그렇다. 석기시대의 도구에 대한 경제학적 설명과 기계제 대공업 시대의 기계에 대한 경제학적 설명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데, 설명의 틀을 제공하는 경제학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영원불멸의 경제학적 입장 같은 것은 없다. 둘째, 비슷한 맥락이지만, 경제의 본질에 해당하는 사회관계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도구를 사용하는 매뉴팩쳐시대의 자본주의가 대표하는 사회관계와 기계를 사용하는 대공업시대의 자본주의가 대표하는 사회관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달리 표현하면 도구를 사용하는 생산에서 기계를 사용하는 생산으로의 이행은 사회관계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며 (즉, 자본에 대한 노동의 형식적 종속에서 실질적 종속으로의 변화), 동시에 이러한 물적 생산조건의 변화 없는 사회관계의 변화란 있을 수 없다. 경제학적 설명의 대상이 역사적 변화의 산물인 이상, 제대로된 경제학적 설명은 사회관계의 변화 – 즉 역사적 요소 – 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

기계와 도구의 차이에 대한 경제학적인 설명은 보통 기계가 도구에 비해 더 높은 노동생산성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류의 설명은 기계와 도구를 동질화하는 것에서 출발하므로 애초에 글러먹었다 – 기계는 기껏해야 고도화된 혹은 배수화된 도구로 전락할 뿐이다. 진정한 경제학적 설명은 기계와 도구가 각각 표현하는 사회관계들의 차이, 이들 사이의 역사적 이행에 주목한다.

(131) 지식, 판단력, 의지의 상실과 지식의 저질화의 시대

야만인이 모든 전쟁기술을 개인의 책략을 발휘한 것과 마찬가지로, 비록 작은 규모에서이기는 하나 독립적인 농민 또는 수공업자도 지식과 판단력과 의지를 발휘했다. – 자본론 1권 14장, 487; MEW 23; 382

지식, 판단력 (또는 이해력 혹은 통찰력), 의지라는 세 단어에 주목하자. 노동에는 이 세 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자신의 것이건, 혹은 타인의 것이건.

그러나 매뉴팩쳐에서는 그러한 능력은 다만 작업장 전체를 위해서만 요구될 뿐이다. 생산상의 정신적(geistig) 능력이 한 방면에서는 확대되면서 다른 여러 방면에서는 완전히 소멸된다. 부분노동자들이 잃어버리는 것은 [그들과 대립하고 있는] 자본에 집적된다. 부분노동자들이 물질적 생산과정의 정신적 능력을 타인의 소유물로 또 자기를 지배하는 힘으로 상대하게 되는 것은 매뉴팩쳐적 분업의 결과다 – 487-8; 382

1. 물질적 생산과정의 정신적 능력 (die geistigen Potenzen des materiellen Produktionsprozesses) – 물질적 생산과정에는 물리적 능력뿐만 아니라 정신적 능력도 필요하다.

2. 자본주의의 논리적, 역사적 발전과정은 지식, 판단력, 의지 – 물질적 생산과정의 정신적 능력 – 을 개별노동자들로부터 자본으로 이전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 분리과정은, 개개의 노동자에 대해 자본가가 집단적 노동유기체의 통일성과 의지를 대표하게 되는 단순협업에서 시작된다. – 488; 382

1. 단순협업의 경우에는 ‘의지’ 정도만 자본가의 몫이다. 매뉴팩쳐에서는 ‘의지’에 더해 ‘지식’과 ‘판단력’마저 자본에 이전된다. 물론 부분노동자의 작업을 위한 ‘의지’, ‘지식’, ‘판단력’은 노동자에게 남지만.

2. 집단적 노동유기체 대신 사회적 노동유기체라고 번역해야 한다. 물론 의미상 차이는 없다. 자세한 내용은 (111) 집단적 노동, 사회적 노동, 결합노동, 공동노동, 공동체적 노동 참조.

그리고 이 분리과정은 노동자를 부분노동자로 전락시켜 불구자로 만드는 매뉴팩쳐에서 더욱 발전한다. 끝으로, 이 분리과정은 [과학을 노동과는 별개인 생산잠재력으로 만들고, 과학을 자본에 봉사하게 만드는] 대공업에서 완성된다.

1. 단순협업에서 의지를, 매뉴팩쳐에서 지식과 판단력을 자본으로 이전시켰다면, 대공업에서는 자본에 이전된 지식이 과학적 지식으로 된다. 매뉴팩쳐에서는 과학이 그래도 자본의 통제 바깥에 있었다면, 대공업에서 과학은 자본에 복속된다.

2. ‘별개인’으로 번역된 selbständige는 ‘독자적인’ 혹은 ‘자립적인’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기계제 대공업에서의 과학의 독자성을 더 강조하는 것이 더 좋겠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단순협업 -> 매뉴팩쳐 -> 기계제 대공업 이후의 새로운 단계를 상정할 수 있을까?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은 우리는 이미 새로운 단계에 진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특징적으로 이 단계에서 노동자들은 (과학적) 지식, 판단력, 의지를 다시 자본으로 빼앗아오고 있다고 한다.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은 기계제 대공업의 시기까지 자본이 이윤을 획득할 수 있었던 이유를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지식, 판단력, 의지를 통제했었기 때문이라고 잘못 이해한다. 그래서 이들이 다시 노동의 손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에서는 자본에게 돌아갈 이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주장을 한다. 이제 자본가에 남은 카드는 지적재산권뿐. 자본가는 이윤 대신 지대를 수취하는 지주로 변신하는 중이다. 더 할말 없다.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법. 논증은 올바른 대전제에서 출발해야 할뿐.

이유는 다르지만 나도 우리가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고 생각한다. 이 새로운 단계의 특징은 (과학적) 지식의 자립화를 넘어선 지식의 상품화다. 지식은 상품이 아니므로 결코 상품이 될 수 없지만, 상품을 닮아갈 순 있다. 팔기 위해 지식을 생산하고, 표준화된 방식으로 지식을 생산하고, 자본의 통제 하에 지식을 생산할 때, 지식은 상품화된다. 지식은 본질적으로 상품과 다르므로 지식의 상품화는 지식의 저질화다. 사람이 개를 닮아가면 사람이 저질화되고, 개가 사람을 닮아가면 개가 저질화되는 것처럼.

관심있는 분은 주류경제학과 신자유주의 비판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필립 미로스키(Philip Mirowski)의 [과학마트 – 미국 과학 민영화하기(Science-Mart – Privatizing American Science)]를 참조. 미로스키에 따르면 지식경제니 창조경제니 하는 중립적인 척하는 용어들 모두 신자유주의의 소산이다. 이 책에 대한 괜찮은 리뷰 아티클은 여기 참조.

(130) 전제와 아나키의 (외적) 이중성

우리는 앞에서 작업장 안의 분업과 사회 안의 분업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살펴본 바 있다.

상품생산과 상품유통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일반적 전제이므로, 매뉴팩쳐 안의 분업은 사회 안의 분업이 이미 일정한 정도로 발전하고 있을 것을 필요로 한다. 또한 거꾸로 매뉴팩쳐 안의 분업은 사회적 분업에 반작용해서 그것을 발전시키며 증가시킨다. – 자본론 1권 14장, 477; MEW 23; 374. (128) 보편적 분업, 특수한 분업, 개별적 분업 참조.

마르크스는 작업장 안의 분업과 사회 안의 분업을 서로 대조하여 분석한 후, 상호연관의 수준을 넘어 이들을 아예 자본주의적 생산이라는 총체 의 두 계기로 파악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사회적 분업에서의 무정부상태[heesang – 아나키]와 매뉴팩쳐적 분업에서의 독재[heesang – 전제]가 서로 다른 것의 조건으로 되고 있[다]. – 482; 377

1.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의 원문에는 ‘지배하는’이 없다. 직역하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사회에서는 (in der Gesellschaft der kapitalistischen Produktionsweise)’이지만 좀 어색하긴하다. 길판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라고 풀어서 써 놓았다.

2. Anarchismus혹은 anarchism을 무정부주의로 번역하는 것에는 다소 문제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우선은 무정부상태라고 하면 누구나 혼란을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아나키스트들이 사회적 질서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들은 필요에 따른 분배를 주장하는데, 이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사회적 질서다. 여기에 더해 아나키스트들은 국가권력의 철폐라는 부정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연합, 상호부조를 강조한다. 그래서 아나키스트들은 자유연합주의나 그냥 아나키즘을 선호한다고. 나도 무정부상태 혹은 길판의 무정부성 대신 ‘아나키’를 쓰기로 한다. 그런데 사실 이 아나키는 상호부조와 호혜의 아나키가 아니라 살벌한 경쟁과 이윤추구로 대표되는 아나키다. 그래도 등가교환이라는 질서에 따른 아나키므로 무정부상태는 아님. 여담이지만 얼마전에 자서전 읽었는데 크로포트킨 정말 매력적이다.

3. ‘독재’가 아니라 ‘전제’인 이유는 (117) 자본가의 전제적 지휘 참조. 지휘 기능은 협업 일반의 산물이지만,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지휘가 협업에 반작용하여 가능한 많은 잉여가치를 쥐어짜내는 역할을 한다. 지휘 그 자체는 전제적일 필요가 없지만, 자본주의적 지휘는 전제적이어야 하는 이유다.

4. ‘서로 다른 것의 전제가 되고 있다’의 원문은 ‘einander … bedingen’. 길판에는 ‘서로를 제약하고 있다’라고 되어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자본주의의 아나키는 경쟁의 아나키다. 살아남기 위해,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생산단가를 끊임없이 낮추어야한다. 심하게 얘기하면 ‘너 죽고 나 살자’의 아나키. 생산단가를 낮추려면 노동일을 늘리거나 (절대적 잉여가치), 노동생산성을 높이거나 (상대적 잉여가치), 노동강도를 높여야 한다 (절대적 잉여가치). 자본가가 노동과정을 완전히 장악하고 그의 뜻대로 생산유기체를 작동시킬 수 있을때만 가능한 방식들이다. 결국 전제적 통제 없이 아나키는 불가능하며, 아나키가 없다면 굳이 전제적 통제가 필요하지 않다.

5. 다시 한번 이중성이다.

[가치 vs. 사용가치]. [추상노동 vs. 구체노동]. [상품관계 vs. 화폐]. [노동력 vs. 인간]. [가치증식과정 vs. 노동과정]. [자본 vs. 기계]. [생산수단으로부터의 자유 vs. 정치적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자본가의 전제적 지휘 vs. 협업에 필요한 지휘].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회적 관계 vs. 초역사적이고 영속적인 존재]. 그리고 [작업장에서의 전제적 통제 vs. 아나키]

전자가 본질이고, 후자가 존재양식이다. 전자는 후자를 통해 후자 속에만 존재하지만, 후자는 전자를 은폐한다. 전자는 보통 관계고, 후자는 보통 존재다. 전자를 잊고 후자에 집중하면 물신주의로 빠지게 된다.

이중성은 동일한 존재의 이중성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아예 별도의 존재로 쪼개지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상품이 가치이면서 사용가치라는 내적 모순은, 상품과 화폐의 외적 대립으로 지양된다. 마르크스가 말한대로, “모순들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순들이 운동할 수 있는 형태를 제공”(133)하는 경우다. 전제적 통제와 아나키 사이의 외적 대립도 비슷한 경우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불평등한 계급관계에 입각한 생산이며 동시에 평등한 상품관계에 입각한 생산, 곧 계급관계의 상품형태에 입각한 생산이다. 불평등하면서 평등한, 불평등이 평등의 옷을 입고 나타나는 모순적인 생산방식이다. 이 내적 모순은 전제적 통제(=불평등한 계급관계)와 아나키(평등한 상품형태)의 외적대립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모순은 운동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를 얻었다.

자본주의의 산물로서의 작업장 안의 분업, 전제적으로 통제되는 이 분업에는 자본주의의 도장이 찍혀 있다:

전체사회 안의 분업은, 상품교환에 의해 매개되든 아니든, 매우 다양한 경제적 사회구성체에 존재할 수 있지만, 매뉴팩쳐에서 수행되고 있는 바와 같은 작업장 안의 분업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전혀 독특한 창조물이다. – 485; 380

이후 마르크스는 매뉴팩쳐의 자본주의적 성격을 다룬다.

(129) 가치법칙과 내적유대의 역습

매뉴팩쳐 안에서는 비례관계의 철칙이 일정한 수의 노동자들을 일정한 기능들에 종속시키지만, 매뉴팩쳐 밖의 사회에서는 우연과 자의가 작용해 사회적 노동의 각종 부문들 사이에 생산자와 그들의 생산수단이 분배되는 것은 제멋대로다 – 자본론 1권 14장, 481; MEW 23, 376

1. 매뉴팩쳐 안과 매뉴팩쳐 밖의 사회의 비교/대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촛점은 매뉴팩쳐 밖의 사회에서 사회적 분업이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에 있다.

2. 우선 “우연과 자의가 작용해 … 제멋대로다”라는 표현에 주목하자. 원문에는 “treiben Zufall und Willkür ihr buntes Spiel…”, 펭귄판에는 “the play of chance and caprice results in a motley pattern”(476)이라고 되어 있다. 길판은 원문을 따라 “우연성과 자의성이 복잡하게 작용한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이 적절한 번역이다. 비봉판과 펭귄판의 번역에는 마치 사회적 분업이 우연과 자의의 산물이라는 인상을 준다. 물론 탑다운 방식으로 자원을 배분하고 생산계획을 수립하는 사회적 계획자가 존재하지 않는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개별생산자의 우연과 자의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우연과 자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곧바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쓴다.

물론 여러 가지 생산영역들이 끊임없이 균형(Gleichgewicht; equilibrium)을 지향하는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각각의 상품생산자는 어떤 사용가치를 생산해서 일정한 사회적 욕망[heesang – 필요]을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며 (이 욕망[필요]들의 크기는 양적으로 서로 다르지만 이 상이한 크기의 욕망들을 하나의 자연발생적 체계에 분배하는 내적 유대가 존재한다) – 481; 376-7

1. ‘물론 … 사실이다’의 원문은 zwar인데, zwar에는 ‘즉’, 혹은 ‘좀더 정확히 말하면’이라는 뜻이 있고, 그런 의미에서 사용된 것 같다. 앞 문단에 대한 부연설명을 하려는 용도로. 즉, 마르크스는 우연과 자의가 상당한 역할을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생산영역들이 균형을 지향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참고로 비봉판, 길판, 펭귄판 모두 ‘사실은 이렇다’류의 번역을 채택했는데, 이 경우에는 두 문장 사이의 연결이 매끄럽지 않다.

2. 균형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 매우 안타깝다. 신고전파 경제학에서와 같이 개인의 의사결정이 필연적으로 사회적 균형을 성립시킨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오히려 위에서 사용한 ‘비례관계’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나았을 것 같다. 그리고, 길판에는 ‘균형을 유지하려고 한다’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미 균형이 성립되어 있다는 뜻이 담겨 있으므로 오역이다. 균형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균형을 성립시키려 한다는 것이 원뜻이다.

3. 상품생산자가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48) 상품의 결사적인 도약 참조.

4. 자연발생적 체계에 대해서는 (49) 사회적 필연이 개별적 우연으로 나타난다 참조. 다만, 사회적 필요의 체계가 아니라 사회적 분업의 체계를 위주로 설명하고 있다.

5. 내적유대는 예를 들면, 자동차 10,000대가 필요하면 타이어는 적어도 40,000개가 필요하다는 것.

6. ‘자연발생적 체계에 분배하는’ – 분배하다의 원문은 verketten인데 ‘연결하다’라는 의미다.  다양한 사회적 필요들을 서로 잘 연결해서 하나의 자연발생적 체계를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7. 균형을 지향하는 첫번째 이유는 비봉판에서처럼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적 유대’의 존재 때문이다. 길판에는 “한편으로는 각 상품생산자가 하나의 사용가치를 생산함으로써 하나의 특수한 사회적 욕망을 충족시켜야 하지만 이 욕망의 크기는 양적으로 달라서 하나의 내적인 유대가 다양한 욕망을 하나의 자연발생적인 체계로 결합시키기 때문”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

다른 한편으로는 상품의 가치법칙은 사회가 [자신이 처분할 수 있는] 전체 노동시간 중 얼마만큼을 각각의 상품종류의 생산에 지출할 수 있는가를 궁극적으로 결정하기 때문이다 – 481; 377

어떤 상품을 얼마나 생산할지가 개인의 입장에서는 우연과 자의의 산물처럼 보일지라도 사회전체적으로는 가치법칙의 통제 하에 있다. 사회적 필요들 사이에도 내적인 유대가 존재하듯이, 사회적 분업의 체계에도 마찬가지로 여러 생산 부문들 사이의 내적인 유대가 존재한다. 마르크스는 1868년 쿠겔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슷한 내용을 다루었다..

1년이 아니라 단지 몇 주 동안이라도 생산을 중단하는 나라는 소멸하고 만다는 것을 모르는 아이는 없다. 서로 다른 필요들(needs)에 대응하는 생산물이 사회적 총노동의 서로 다른 그리고 양적으로 규정된 부분을 요구한다는 것을 모르는 아이 역시 없다. 사회적 노동이 특정한 비율로 분배되어야 한다는 이러한 필연성을 사회적 생산의 특수한 형태를 통해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단지 이 [필연성 – heesang]이 나타나는 형태가 달라질 뿐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 (강조는 원문)

사회적 노동의 상호연관이 개별적 노동생산물의 사적 교환에 의해 나타나는 사회에서 노동의 비례적 배분이 관철되는 형태는 바로 이들 노동생산물의 교환가치이다. (강조는 원문)

자 이제 가장 핵심적인 문장으로….

그러나 여러 가지 생산영역들이 균형으로 향하는 이 끊임없는 경향은 이 균형의 끊임없는 파괴(Aufhebung)에 대한 반작용(Reaktion)으로 작용할 뿐이다 – 481; 377

1. 신고전파 경제학에서 균형은 개인들의 의사결정의 필연적인 종착점이다. 개인들은 효용을 극대화하고 이윤을 극대화하는 행동을 하지만, 그 이기적 행동은 경제를 사회전체의 후생을 극대화하는 균형점으로 유도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고전파 경제학에서는 이기적 인간만이 진정으로 이타적 인간일 수 있다.

2. 마르크스에게 균형은 개인적 행동의 결과로서의 필연적 종착점이 아니다. 균형은 (좀더 엄밀하게는 자본주의 경제의 내적 질서, 내적 비례관계는) 개인적 행동과 무관하게 우선 존재하고 개인들의 행동을 규정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에게서 언제나 그런 것처럼, 형태는, 존재양식은, 본질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다. 특히 개별적 의사결정에서는 우연과 자의의 영향을 결코 배제할 수 없으며, 개별적 의사결정의 총합은 언제나 균형, 내적 질서, 내적 비례관계로부터 괴리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균형의 끊임없는 파괴”라는 표현을 썼다 (파괴의 원문이 Aufhebung이므로 ‘지양’이 어떨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지만 자신 없으므로 패스). 어쨌든  이렇게 마르크스가 균형을 신고전파 경제학의 균형과 완전히 다른 의미에서 사용했기 때문에 나는 마르크스 경제학에서는 아예 균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3. 균형은, 내적질서는, 내적 비례관계는 이런 괴리를 일단은 두고 보고 있다가 어느 시점에 여기에 반응 혹은 반작용(Reaktion; reaction)한다. 가격과 가치의 괴리는 어느 순간에는 해소되어야 하고, 무질서와 우연과 자의도 어느 순간에는 사후적으로 바로잡혀야 한다. 나는 이러한 내적 유대, 가치법칙의 파괴적 관철이 경제위기에 대한 가장 추상적인 수준의 해명이라고 생각한다. 자세한 내용은 (26) 달이 지구와 부딪히는 날이 올까 참조.

[작업장 안의 분업이 의거하고 있는] 계획되고 규제되는 사전적 체제는 사회 안의 분업에서는 [생산자들의 규제받지 않는 변덕을 통제해야 하는] 자연적인 사후적 필연성(이것은 시장가격의 변동에서 알 수 있다)으로 변한다. – 481; 377

1. 길판에는 사전적(a priori), 사후적(a posteriori)이 각각 선험적, 경험적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아무래도 어색하다.

2. ‘변덕’으로 번역된 Willkür는 앞에서는 ‘자의(恣意)’로 번역되어 있다.

3. 규제되는 사전적 체제 vs. 규제받지 않는 변덕에 주목.

(128) 보편적 분업, 특수한 분업, 개별적 분업

만약 우리가 노동 그 자체만을 염두에 둔다면, 농업, 공업 등과 같은 주요부문들[heesang – 속(屬; Gattung; genus)]로의 생산의 분할을 일반적[heesang – 보편적] 분업, 그리고 이들 생산부문[heesang – 속]의 종(種; Art; species)이나 아종(亞種; Unterart; sub-species)으로의 분할을 특수한 분업, 그리고 하나의 작업장 안의 분업을 개별적 분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자본론 1권 14장, 475: MEW 23, 371

1. 일단 종 < 속 < 과 < 문 < 강 < 문 < 계에 대응하는 영어 표현은 species < genus < family < order < class < phylum < kingdom, 독어 표현은 Art < Gattung < Familie < Ordnung < Klasse < Reich. 중요한 사항은 아니지만, 이에 맞추어 번역을 하는 것이 올바르다.

2. 보통 철학에서 보편-특수-개별의 틀을 사용하니까 일반적 분업보다는 보편적 분업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길판에도 일반적 분업으로 되어 있음.

3. 그런데 마르크스는 굳이 왜 보편적 분업, 특수한 분업, 개별적 분업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 보편-특수-개별은 철학에서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 같다. 하나는 개념들을 계층화해서 삼단논법에 활용하는 방식이다. 가령 부천시, 경기도, 대한민국이 각각 개별, 특수, 보편에 대응하는 경우다. 부천시는 경기도의 일부이다, 경기도는 대한민국의 일부이다, 고로 부천시는 대한민국의 일부이다는 삼단논법의 논증이 가능하다. 개별이 특수의 일부이고, 특수가 보편의 일부이므로 개별이 보편의 일부라는 것.

4. 다른 하나는 헤겔의 용법이다. 헤겔은 보편-특수-개별의 삼단논법을 논리학의 후반부에서 다루는데 여기서는 삼라만상의 내적연관, 일종의 세계일화(世界一花)가 전제되어 있다. 베이징에서의 나비의 날개짓이 태평양에 폭풍을 일으키고, 이때 먹구름 속에서 우는 천둥이 봄부터 울던 소쩍새와 더불어 한송이 국화꽃을 피워낸다는 식이다. 이러한 개별적 대상, 사건, 개념들 사이의 연관은 특징적으로 특수와 보편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다. 하나하나의 개별자는 (특수자를 매개로 한) 보편자의 인스턴스이며 – 다시 말해 근원이 같으므로 개별자간 상호연관이 가능하다 – 보편자는 (플라톤의 이데아에서처럼) 개별자, 특수자와 별도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특수자와 개별자 내부에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보편-특수-개별 사이의 이러한 물고 물리는 연관관계 때문에 헤겔은 개별 < 특수 < 보편의 단방향 삼단논법 외에도 특수 < 개별 < 보편, 개별 < 보편 < 특수 등의 다양한 방식의 삼단논법을 다루었다. 셋 중 하나만 빠져도 모든게 무너져 내리고 만다.

5. 부천시의 경우는 다르다. 부천과 경기도 그리고 경기도와 대한민국 사이의 관계는 순전히 외적 관계이다. 부천을 없앤다고 대한민국의 존립에 문제가 될 이유는 없으며, 부천을 인천광역시에 편입시키면 안될 아무런 이유가 없다.

6. 분업의 경우는 어떨까. 시계테엽생산노동, 시계생산노동, 제조업 노동을 개별, 특수, 보편의 틀을 통해 살펴보자. 1) 제조업 노동은 시계테엽생산노동과 같은 다종다양의 구체적 유용노동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2) 시계생산노동, 마차생산노동과 같은 사회 내의 제품별/산업별 분업은 경제 내의 제품간 산업간 연관관계를 반영한다. 3) 시계테엽생산노동은 조밀하게 짜여진 사회적 분업의 체계 속에서 예를 들어 마차바퀴생산노동과도 연관되어 있다 (생산된 시계를 마차로 배송하는 경우를 상정해보라).

심지어 작업장 내 분업은 사회 안의 분업에 의해 규정될 뿐 아니라 거꾸로 사회 안의 분업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특수가 개별을 포함한다는 계층적 이해를 버려야 하는 까닭이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쓴다.

상품생산과 상품유통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일반적 전제이므로, 매뉴팩쳐 안의 분업은 사회 안의 분업이 이미 일정한 정도로 발전학 있을 것을 필요로 한다. 또한 거꾸로 매뉴팩쳐 안의 분업은 사회적 분업에 반작용해서 그것을 발전시키며 증가시킨다. 노동도구의 분화에 따라 이 도구를 생산하는 산업들도 더욱 더 분화된다 – 477

(127) 미숙련공은 숙련공의 미래. 비정규직은?

매뉴팩쳐는 [그것이 장악하는 모든 업종 [heesang – 수공업] 에서] 이른바 미숙련노동자라는 하나의 부류[수공업은 그 성질상 이러한 부류를 엄격히 배제한다]를 만들어낸다 – 자본론 1권 14장, 473-4; MEW 23, 371

등급제의 등급과 나란히 숙련공과 미숙련공이라는 단순한 구분이 나타난다 – 474; 371

자본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이며, 이 사회적 관계는 상품관계이고 착취관계이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다소 밍숭맹숭하다. 자본은 사회적 관계 (혹은 구조)임과 동시에 사회적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관계로서의 자본의 본질이 잉여가치의 생산에 있다면, 사회적 과정으로서의 자본은 잉여가치 생산규모의 절대적, 상대적 증대 과정이다. 관계와 과정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관계는 과정을 규정하며, 과정은 관계를 (재)생산하고 강화한다. 달리 표현하면, 관계는 과정의 전제이며 결과이다.

과정으로서의 자본의 논리를 생산성 증대와 잉여가치 생산규모의 확장이라는 추상적 결과로 파악하는데 그쳐서는 안된다. 새로운 기술의 도입은 경쟁우위 확보와 상대적 잉여가치 생산이라는 경제적 필요 이외에도 노동에 대한 자본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일종의 계급투쟁적 필요에 근거한다. 동시에 새로운 기술, 새로운 생산방식은  언제나 특수한 조건 (예: 기술적 조건과 계급역관계)에서 제기되는 특수한 문제에 대한 특수한 해법이며, 이전에 살펴본 것처럼 양적 변화 뿐만 아니라 질적 변화를 요구하기도 한다.

매뉴팩쳐시대 (“대략 16세기 중엽에서 18세기의 마지막 1/3”, 455)에 존재한 매뉴팩쳐라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자본주의적 생산형태 역시 생산성 제고와 노동통제 강화를 목표로 한 특수한 해법이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1절 “매뉴팩쳐의 두 가지 기원”에서는 매뉴팩쳐가 어떤 특수한 조건 – (일정 수준의 사회내 분업을 전제하는 단순협업에 기반한) 자본주의적 수공업 – 에서 발생했는지를 다루고, 2절 “부분노동자와 그의 도구”에서는 매뉴팩쳐에서 생산성 증대와 통제의 강화가 어떤 방식 – 노동자의 부분화와 일면화  – 으로 이루어지는지를 해명한다.

특수한 구조로서의 매뉴팩쳐는 매뉴팩쳐에 고유한 구조적 효과 – 대표적으로 노동력 등급제와 숙련공과 미숙련공 사이의 구분 – 를 생산하며, 이 구조를 (재)생산하는 생산성 증대의 과정은 어느 시점에는 특수한 해법을 요구하는 특수한 문제에 봉착한다. 추후에 다루겠지만, 이 특수한 문제는 매뉴팩쳐에 의한 기계의 생산(513), 숙련공에 의한 기계의 생산이라는 모순이며, 이에 대한 해법은 기계에 의한 기계의 생산, 미숙련공에 의한 기계의 생산, 즉 숙련공과 미숙련공 사이의 구분을 철폐하고 숙련공을 미숙련공화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매뉴팩쳐는 숙련공과 미숙련공 사이의 구분을 만들어내지만, 종국에는 숙련공을 미숙련공화하는 물적 토대를 제공한다.

숙련공과 미숙련공 사이의 구분과 라임이 잘 맞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구분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전자가 분업에 기반한 생산이라는 특수한 생산형태의 한 필연적 결과인 것처럼 후자를 “생산과정의 지적 요소들을 육체적 노동으로부터 분리”(568)시키는 기계제 대공업의 필연적 결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상대적으로 대체가 용이한 작업에 비정규직 노동자가 많이 고용된다는 점을 감안하면그런 측면이 분명히 있지만, 동일노동을 정규직 노동자가 수행하기도 하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수행한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게다가 오늘날의 노동시장은 이러한 단순한 이분법적 분할보다 훨씬 복잡한 방식으로 분절되어 있다. 예를 들어 정년과 풍성한 연금이 보장되는 교원/공무원과 항상적인 고용불안과 노후걱정에 시달리는 대기업/중소기업 정규직 노동자 사이에는 (정규직, 비정규직 사이의 구분과는 다른) 분명한 위계가 존재한다.

자본론 1장 14장까지 마르크스는 (자본에 고용되어 가치를 생산하는) 생산적 노동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물론 13장에서 협업에 필요한 감독, 지휘, 통제 기능을 다루기는 하지만, 분석의 촛점은 노동의 분화보다는 이들의 기능적 필요성을 짚고 넘어가는 것에 맞추어져 있다. 마르크스는 아직 상품의 판매, 가치의 실현, 대부와 투자업에 종사하는 비생산적 노동에는 관심이 없으며, 아예 자본에 고용되지 않는 공무원, 교사, 종교인, 그리고 자영업자와 전업주부 등은 완전히 논외로 하고 있다. 따라서 숙련공과 미숙련공 사이의 구분과 관련된 마르크스의 분석을 업종과 분야를 막론하고 전방위적으로 존재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구분에 곧바로 적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다음의 몇 가지 측면을 지적하고 싶다.

첫째, 미숙련공의 탄생이 특수한 조건에서 발생하는 특수한 문제에 대한 특수한 해법인 것처럼 비정규직의 탄생을 일종의 특수한 해법으로 다룰 수 있다. 그리고 미숙련공의 탄생이 기술적 해법의 필연적 결과에 해당한다면, 비정규적은 제도적으로 만들어진 위계의 산물이라는 차이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둘째, 미숙련공과 숙련공의 구분이 기계제 대공업에 의해 철폐된 것처럼 정규직의 비정규직화의 흐름도 분명히 존재한다. 정규직의 당일 해고가 가능한 미국의 경우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어떤 유의미한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교사나 공무원 역시 정년을 보장받지 못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미셸 리가 나올 수 없음). 유럽에서도 보통 1-3개월의 노티스 기간이 주어지기는 하지만, 정규직 해고가 자유롭다.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에서 정규직이나 교사, 공무원 등의 특수직종 종사자가 누리는 일종의 특권은 더 이상 지탱될 수 없는 수준에 이른 것 같다.

셋째, 비정규직 생산직 (혹은 판매직) 노동이야말로 마르크스의 생산적 노동 개념에 가장 부합하는 노동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교사나 공무원이 스스로를 노동자로 인식하고 (어쨌든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구체적 유용노동을 수행한다. 물론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지만) 가장 낮은 등급의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노동 일반은 자기 실현의 도구이고 신성하다 할 수 있으나, 자본주의적 노동은 자기를 실현하기는 커녕 파괴하고, 신성하기는 커녕 속세의 모든 번뇌와 고통의 원천이다. 물론 노동자들은 이 비루함 속에서도 변화의 담지자가 되지만…  노동이라는 깃발 아래 모이는 까닭이 자본주의적 노동의 철폐에 함께하기 위한 것이라면 좋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의 인간의 모든 활동을 노동이라는 바케쓰 안에 우겨넣는 것은 옳지 않다.

넷째,  노파심에서. 자본-노동관계가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적 사회적 관계에 해당하기 때문에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비생산적인 다종다양한 노동들 역시 각각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본-노동관계의 자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지 않다면 군사부 삼위일체의 한 축인 선생님들이 대체 왜 ‘월급’이란 걸 받겠어? 전업주부와 교사, 그리고 공무원에 대한 분석이 노동력 재생산이나 자본주의에서의 국가의 기능을 다루지 않는다면 얼마나 허망할까  (여기에 대한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벤 파인의 노동시장이론: 건설적 재평가 (Labour Market Theory: A Constructive Assessment) 참조. 특히 7장 마르크스주의적 대안이 유용함. 메일 주세요).

(126) 노동력등급제

집단적 노동자(Gesamtarbeiter)가 수행하는 각종 기능에는 단순한(einfach) 것과 복잡한(zusammengesetzt) 것, 저급의(niedrig) 것과 고급의(höher) 것이 있기 때문에, 그 구성원(Organe)인 개별노동력은 상이한 정도의 훈련을 필요로 하며 따라서 각각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 자본론 1권 14장, 473; MEW 23, 370

1. 복잡노동, 단순노동, 노동력의 가치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2. 집단적 노동, 총노동, 결합 노동 등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3. 일관성의 측면에서 구성원(Organe)보다는 기관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매뉴팩쳐는 노동력의 등급제를 발전시키며, 이것에 임금의 등급이 대응하게 된다.

매뉴팩쳐의 시대에는 복잡노동이라는 카테고리가 그렇게 예외적이지 않았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런데 실상은 오늘날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기계화는 복잡노동에서 복잡한 요소를 제거해서 복잡노동을 단순노동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인데, 만사가 단방향으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니까. 기계화를 통해 예전에는 없던 새로운 종류의 노동이 만들어지고, 이런 새로운 노동들이 복잡노동인 경우가 있다 (항공정비?).

그래서 노동력 등급제는 과거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125) 협업이라는 기반을 더 단단히 하는 매뉴팩쳐

작업장 전체를 보면, 원료는 생산의 모든 단계에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많은 부분노동자들의 결합으로 구성되고 있는] 집단적 노동자는 어떤 한 종류의 도구로 무장한 하나의 손으로 철사를 뽑고, 동시에 다른 종류의 도구로 무장한 다른 손으로 이 철사를 곧게 펴고, 또 다른 손으로 그것을 끊으며, 또 다른 손으로 그 끝을 뾰족하게 하는 등의 일을 한다. 이전에는 시간 상 차례차례로 수행한 서로 다른 부분과정들이 이제는 공간상 병행해서 동시에 수행된다. 그러므로 동일한 기간에 더 많은 완성품이 생산된다 – 자본론 1권 14장, 466; MEW 23, 364

훌륭한 비유다.

이 동시성이 총과정의 일반적 협업형태로부터 생긴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매뉴팩쳐는 협업의 기존의 조건들을 이용할 뿐 아니라 어느 정도까지는 수공업적 노동을 다시 세분화함으로써 협업의 조건들을 창조해 내기도 한다 – 467; 364

1. 동시성이 가져다 주는 이득은 협업 일반의 속성이므로, 협업의 한 형태로서의 매뉴팩쳐에도 역시 동시성이 가져다 주는 이득이 존재한다. 여기에 더해 매뉴팩쳐는 협업을 심화한다. 협업의 한 특수한 형태로서, 매뉴팩쳐는 분할과 전문화를 통해 협업이 필요한 환경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매뉴팩쳐는 협업의 안정적인 형태다. 달리 표현하면 협업은 매뉴팩쳐의 기반이고, 매뉴팩쳐는 협업을 심화한다. 아이폰은 앱스토어의 기반이고, 앱스토어의 수많은 앱은 아이폰 판매를 촉진한다. 이 물고 물리는 관계는 아이폰과 앱스토어가, 협업 일반과 매뉴팩쳐가, 각각 홀로 서기에는 뭔가 아쉬운, 별도로 분석할 수 있겠지만 거기에 그치면 뭔가 찝찝한, 총체의 계기들임을 의미한다.

2. 지극히 마르크스스러운 서술이다. 가치는 화폐를 낳고 화폐는 가치생산을 심화한다. 상품생산은 자본을 낳고, 자본은 상품생산을 심화한다. 세계시장은 자본주의를 낳고, 자본주의는 세계시장을 심화한다, 등등등. 조건이면서 결과!

3. “협업의 기존의 조건들을 이용할”의 원문은 “die Manufaktur findet nicht nur die Bedingungen der Kooperation vor”이다. “기존의”는 빠져야 한다. vorfinden은 이용하다가 아니라 (곁에서 쉽게) 발견한다는 뜻이다. 의역을 한다면 ‘이어 받는다’ 정도가 낫지 않을까 싶다.

4. “어느 정도까지”에 연결되는 것은 세분화가 아니라 창조다.

그래서 다시 번역해보면:

매뉴팩쳐는 협업의 조건들을 이어 받을뿐만 아니라 수공업적 노동을 다시 세분화함으로써 어느 정도까지는 협업의 조건들을 창조해 내기도 한다.

(124) 부분노동자(Teilarbeiter), 분업(Teilung der Arbeit), 부분기능(Teilfunktion)

매뉴팩쳐는 … 인간을 그 기관으로 하는 생산 메커니즘이다 – 자본론 1권 14장, 458; MEW 23, 358

독립수공업자가 하나의 완전한 인간이라면, 매뉴팩쳐에서 인간은 인간의 기관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 – 팔, 다리, 간, 위장, 눈 등등.

대신 기관으로서 인간은 나름의 독립성을 유지한다. 기계제 대공업에서는 이런 종류의 독립성을 찾아볼 수 없다.

수공업자의 숙련이 여전히 생산과정의 토대로 되어 있기 때문에, 각 노동자는 오로지 하나의 부분 기능(Teilfunktion)만을 수행하게 되고, 그의 노동력은 이 부분 기능(Teilfunktion)의 평생의 기관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 458-9

Teil-(부분)이라는 접두어는 앞으로 계속 나오므로 주목하도록 하자. 가령 분업은 Teilung der Arbeit, 부분노동자는 Teilarbeiter다. 펭귄판에 보니 부분 기능은 partial function, 분업은 the division of labour, 부분노동자는 specialised worker로 번역되어 있다.

매뉴팩쳐의 살아 있는 메커니즘을 형성하고 있는 집단적 노동자는 순전히 이와 같이 일면적으로 전문화된 부분노동자들(Teilarbeitern)로 구성되어 있다 – 459; 359

집단적 노동자는 부분노동자들을 팔, 다리, 간, 쓸개, 위장 등등의 기관으로 사용하는 하나의 커다란 인간이나 마찬가지다. 그림으로 그려놓으면 재미있겠다.

매뉴팩쳐는 [이미 사회에 존재하던] 직업의 자연발생적 분화를 작업장 안에서 재생산하고 또 그것을 체계적으로 끝까지 추진함으로써 부분노동자들의 숙련(Virtuosität)을 생산해 낸다 – 460; 359

그러므로 매뉴팩쳐에서는 숙련노동자와 비숙련노동자, 복잡한 노동과 단순한 노동의 구분이 철저하게 유지된다.

(123) 세포 비유에서 유전자 비유로

신고전파 경제학과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의 방법론 상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신고전파 경제학과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의 대상이 경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신고전파 경제학은 인간의 여러 기관들이 작동하는 방식들을 탐구하고, 그 방식들 이면에 어떤 원리들이 있는지를 밝히는데 주력할 것이다. 특징적으로 인간의 다종다양의 기관들 각각의 특수성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이들이 작동되는 가장 근본적인 원리는 하나 혹은 둘로 환원될 수 있다고 볼테고.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은 각각의 기관의 작동 방식에도 관심이 있지만, 인간이라는 유기체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떻게 지속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은 유기체, 총체로서의 인간을 머릿 속에서 재구성해내는 것을 목표로, 유기체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에서 출발해서 “발달한 신체”로 차근차근 나아갈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마르크스는 세포 비유를 사용한 적이 있다. 세포 비유에 유전자 비유를 더하면 마르크스의 방법을 이해하기가 더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발달한 신체는 신체의 세포보다 연구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경제적 형태의 분석에서는 현미경도 시약도 소용이 없고 추상력이 이것들을 대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노동생산물의 상품형태 또는 상품의 가치형태가 경제적 세포형태이다  – 자본론 1권, 1판 서문, 4; MEW 23, 11, 강조 추가

세포는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모든 유기체의 기본 구조 및 활동 단위”다. 1839년 테오도어 슈반과 마티아스 슐라이덴이 모든 유기체가 적어도 하나 이상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고 발표했는데, 마르크스가 자본론 1권을 쓴 것이 1867년이니 그가 “세포형태”라는 표현을 썼을 때는 적어도 이 정도의 연구수준은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세포에는 “발달한 신체”로서의 유기체의 구성과 관련된 코드화된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 이 정보의 기본단위는 유전자(gene)이고, 유전자는 유전형질(genotype)을 규정한다 (인간에게는 2만개에서 2만 5천개의 유전자가 있다고 한다 – 모든 유전자를 다 합쳐놓은 것이 유전체 혹은 게놈).

유기체의 발생과 성장은 유전자에 코드화된 정보에 따라 이루어진다. 달리 표현하면 유전자의 발현의 결과가 유기체의 발생과 성장이다 (유전형질은 특수한 종을 규정하는 특징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유전형질이 유전자에 코드화된 그대로 개체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유전자의 발현은 특수한 환경 하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유기체와 외부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에 따라 동일한 유전형질이 상이한 형태 – 이것을 표현형질(phenotype)이라고 한다 – 로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쌍둥이는 동일한 유전형질을 갖지만 그 표현형질은 상당히 다를 수 있다. 아토피성 피부염 유전형질을 가진 모든 사람이 실제로 아토피성 피부염에 걸리는 것은 아니며, 증상과 심각성 역시 사람마다 다르다.

요약하면 이렇다:

세포는 유기체의 기본단위이며 유기체의 구성과 관련된 모든 정보(유전체)를 담고 있다. 개별유전자는 코드화된 그대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발현과정에서 외부환경의 영향을 받아 특수한 표현형질로 나타난다. 유전자의 발현을 통해 유기체가 발생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낱낱이 밝히는 방식으로 이 유기체를 머릿 속에 재구성해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쓸 수 있지 않을까?:

상품은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단위이며, 자본주의 경제의 구성과 관련된 모든 정보(가치)를 담고 있다 (주의 1). 변증법적 서술을 통해 가치로부터 자본주의 경제의 내적 법칙들이 도출된다 (주의 2). 하지만, 이 내적법칙들은 발현과정에서 반경향이나 우발성 등에 직면하며, 이들과 모순적으로 공존하는 방식으로 현상한다. 자본주의 경제의 가장 단순하고 추상적인 범주인 가치로부터 유기체이자 총체로서의 자본주의 경제를 머릿 속에 체계적으로 재구성해내는 학문이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이다.

(주의 1) 가치라는 범주에 자본주의 경제에 관한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는 뜻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경제의 내재적 법칙들을 도출하는 과정을 마치 주체로서의 가치의 운동인 것처럼, 가치로부터 이 법칙들이 가만두어도 자동으로 생산되는 것처럼 서술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가치에 모든 정보가 담겨져 있다는 식의 비유를 약간 내멋대로 해본거다.

(주의 2) 생명체의 경우에는 실제로 코드화되어 있는 유전자에 근거하여 배아가 성체로 자란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가치로부터 자본주의 경제가 발생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주장하면 헤겔식 관념론이라고 욕들어 먹는다). 가치로부터 유기체로서의 자본주의 경제가 발생하고 성장하는 과정은 역사적, 시간적 과정이 아니라 논리적, 분석적 과정이다.

고등학교, 대학교 때 열심히 공부할 걸 –; 유전자, 세포 등등등 어렵다. 잘 이해했는지 자신이 없다. 어쨌든 망신당할 걸 각오하고 상동관계를 정리해 보면:

  • 생명체 <-> 자본주의 사회
  • 세포 <-> 상품
  • 세포분열과 복제, 세포의 신진대사 <-> 상품의 생산과 교환과 소비
  • 줄기세포 <-> 화폐(?)
  • 유전자 <-> 가치
  • 유전형 <-> 자본주의 경제의 내재적 법칙 (경향)
    • 한 종류의 유전자에 한 종류의 유전형이 대응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썩 만족스럽지 않다.
  • 표현형 <-> 자본주의 경제의 복잡다단한 현상
  • 전사, 단백질 합성, 기관 생산 <-> 변증법
  • 외부환경과의 상호작용 <-> 역사적, 우발적 요소를 분석에 도입
  • 생식 <-> 전쟁, 정복을 통한 자본주의의 이식
  • 죽음 <-> 자본주의의 종말 (이게 제일 마음에 든다)

생물학과 마르크스에 모두 정통한 분 안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