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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실러, 강남좌파의 사상적 지주

오늘날 (정치)경제학을 비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만약 그 비판의 대상을 찾는다면, 그것은 ‘누구’일까? 당연히 한 두 사람이 아니겠지만, 로버트 실러(Robert Shiller)는 분명 그 중 맨 앞줄에 세워야 할 하나일 것이다.

실러가 최근에 또 하나의 책을 냈다고 한다(참조). 제목은 {Finance and the Good Society}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2). 제목에서 암시되듯이 이 책의 핵심 내용은 “금융을 잘 길들이면 좋은 사회를 이루는 데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다”, 나아가 “그렇게 하는 데 금융은 필수적이다” 정도로 요약될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누구나 하는 말이긴 하지만, 그간 금융의 부작용에 대해 경고성의 글을 써온 그이기에 조금은 예외라고 여길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위에 링크한 {The Economist} 기사를 읽다가 내용이 궁금해 출판사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는 ‘Introduction’을 좀 봤다(여기). 그런데…. 이건 정말, 뜨아..!! 마르크스를 언급하는 부분, 나아가 마르크스가 말한 ‘코뮤니즘'(소련이나 중국의 현실 사회주의 말고)를 전유하는 방식, 그럼으로써 궁극적으로 금융의 이로움을 역설하는…. 말하자면, 이 ‘삼단논법’이 정말 가관이다.

우리에겐 익숙한 ‘시초축적’, 그러니까 생산수단을 박탈당한 무산자가 근대적 임노동자 계급으로, 그리고 반대로 생산수단을 독점한 이들이 근대적인 자본가 계급으로 분화되는 것을 다룬 마르크스의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실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르크스는 왜 노동자들이 자본[=생산수단]에 접근할 수 없는지를 명확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자본주의 하에서는 사회의 목표들이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윗대가리들—자본에 접근할 수 있는 자들—에 의해 설정된다고 암시할 뿐이다. 가난한 노동자가 은행으로부터 신용대출을 하거나 부유한 투자자들로부터 자본을 얻어 사업을 시작하는 게 절대 불가능하다는 암묵적인 가정이 있을 뿐이다. (p. 5)

물론 우리는 위에서 실러가 ‘명확하지 않다’고 하는 것을 꽤 ‘명확하게’ 알고 있으며, 그것은 ‘암묵적인 가정’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물적 현실임도 잘 알고 있다. 그걸 모르는 것은 그저 실러 자신일 뿐이다. 하여튼, 위와 같이 자기 멋대로 문제를 설정해 놓고 바로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이 ‘공자님 말씀’을 내놓는다.

그러나 이상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훌륭한 사업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은,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그것[자본을 구해 사업을 시작하는 것]을 할 수 있다. 우리의 자본주의 제도들이 아직은 그 정도의 이상에 걸맞게 성숙하진 못했지만, 역사를 들여다보면 금융의 민주화, 즉 모두에 대한 금융 기회의 개방으로 향하는 장기추세가 관찰된다. (p. 5)

헛, 금융의 민주화라고? 카드대란도 모르냐?! 그게 니가 말하는 민주화냐!!!…라고 당신은 비웃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설마 우리의 실러 교수가 그걸 모를리가! 그러나 그는, 그런 문제는 그저 사춘기와도 같은, 성숙을 위해 겪어야 하는 불가피한 아픔이라고 보는 듯하다.

하지만 이것은 금융 자본주의(financial capitalism)의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금융 자본주의를 민주화하고 인간화하며 그것의 범위를 확장하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기본적인 문제의식이 마르크스의 새로운 사회에도 깃들어 있다. (pp. 5-6. 강조는 원문.)

이쯤 되면, ‘막장’이란 말도 아깝지 싶다.

아, 조만간 이 책도 누군가가 번역해서 내겠지? 예상 독자는? 뻔하지. 한마디로, 강남좌파. 쩝… 그 자칭 ‘강남좌파’들이 위 책을 들고, 자신들의 한때 마음속 숭배대상이었던 ‘마르크스’와 자신들의 현실적인 숭배대상인 ‘금융’을 함께 품으며 젠체할 거 생각하니, 벌써부터 토나올라고 한다. 기분 드럽네.

마, 니들끼리 잘먹고 잘살어라!

(이쯤에서, 과거 글 자본주의 질서를 둘러싼 정당성 전쟁도 한번 더 되새겨본다. 이 글에서 스티븐 그린과 로버트 실러를 한패거리로 묘사했는데, 공교롭게도 실러의 이번 책은 벌써 그 제목부터가 그린의 ‘선한 가치’를 떠오르게 한다.)

국가 자본주의의 부상?

이번 호 {The Economist} 특집이 재밌다. 제목은 “State Capitalism”, 즉 “국가 자본주의”다(링크). 어쩌면 매우 적절하게도 표지모델로는 우리의 레닌 동지께서 등장하셨다. 정말이지… 어디에 내놔도 모자람이 없는 저 위용…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간지를 잃지 않는다. -_-

언제나 간지를 잃지 않으시는 레닌 동지
언제나 간지를 잃지 않는 레닌 동지. 달러 표시가 된 담배를 손에 쥐고 있는 게 인상 적이다. 의도된 건 아니겠지만, 타들어가는 담배가 마치 달러의, 그리하여 세계 자본 주의의 허망한 미래를 암시하는 것 같지 않은가. (출처: The Economist)

그러나 쭉 훑어본 결과, 이번 기사는 피상적이기 그지없다.

기본적으로 {The Economist}는 시뻘건 레닌 동지를 표지에 모시는 “객기”를 부리는 데까지는 갔지만, 제목을 “State Monopoly Capitalism”이라고 뽑는 선명성을 발휘하는 데는 실패했다(실제로 특집기사에서 소개되는 “국가 자본주의”는 “국가 독점 자본주의”라고 불려 마땅하다). 더구나 위와 같은 표지에도 불구하고, 실제 기사엔 “Lenin”이란 이름은 한번도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소련을 포함한 사회주의에 대한 얘기도 오직 지나가면서 슬쩍 언급될 뿐이다. 동지께서 일개 부르주아 언론의 선정성 장난질에 놀아난 것 같아 심기가 편치 않다.

그러나 이번 기획과 같은 기사들이 별 도움이 안 되는 정말로 중요한 이유는, 얘들은 국가가 무엇인지, 자본주의 경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둘의 관계는 진정 무엇인지 등과 같은 본질적인 질문들을 제기할 능력이 없다—“능력”이 없으므로 그럴 “의도”도 애초부터 없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번 기획에서 핵심 포인트는 세계경제의 패러다임이 (서유럽을 중심으로 발달한) “자유시장 자본주의”에서 (중국 등을 중심으로 한) “국가 자본주의”로 전환하고 있다는 것일텐데, 여기서 “자본주의 경제”와 “국가”—물론 여기서 “국가”란 “근대국민국가”다—는 그저 병치될 뿐, 둘이 어떻게 하나에서 뻗어나온 일종의 “이란성 쌍둥이”인지, 그리하여 둘을 서로 멀리 떨어뜨려 놓기도 하고 다시 결합시키기도 하는 어떤 힘이 있는 것은 아닌지, 따라서 결국 그들이 각각 “자유시장 자본주의”와 “국가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은 같은 것은 아닌지…. 등과 같은 정말로 중요한 질문들은 제기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이번 기획기사에서 자본주의 경제와 국가(=근대국민국가)는 그저 서로 전혀 상관없이, 어쩌면 그 어떤 역사적 우연 때문에 서로 마주섰을 뿐인 것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때로는 국가는 자본주의 경제에 의해 외면당하기도 하고(이를테면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라는 노무현의 탄식도 이런 관점에 입각돼 있다), 또한 (“국가” 자본주의의 예에서처럼) 스스로 그것을 잡아삼킬 수도 있다. 이리하여, 이번 기획의 저자들은, 한편으론 최근 (준)국영기업들이 주식시장에 상장되는 등의 사례를 들면서 “오늘날의 국가 자본주의는 과거의 국가 자본주의(즉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와는 다르다”라고 하면서도, “부패와 연고주의가 우려된다”라는 그야말로 구태의연하기 짝이없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다시 말해, 부패와 연고주의는 경제라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국가”—특히 동아시아 국가!—만의, 그것도 “영원불변의” 특징이라고 보는 것임).

(이와 같은 시각보다 좀 더 유연한 게 장하준 식의 “발전국가”다. 여기에서는 국가의 자율성이 좀 더 적극적으로 사고되어 국가형태의 다양성이 인식되고 또한 다면적으로 조명되지만(이를테면, “연고주의”라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여전히 국가는 경제와 외부적으로만 관계맺을 뿐이고 범지구 자본주의 하에서 착취와 가치증식의 조건이 어떠하든 간에 국가가 정책만 잘 펼치면 좋은 세상이 온다고 그려진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이들은, 도대체 왜,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발달 국면에서 국가라는 것이 다시금 전면에 부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인지를 묻지 않는다. (그저 역사란 돌고도는 것이라는 아주 간편한 사관이 모든 것을 정당화해줄 뿐이다. — 여기에 덧붙여, 장하준 선생쪽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거봐. 우리가 맞았지!” 그러나 과연 이들이 20년쯤 뒤에 상황이 또 바뀌면, “음, 우리가 틀렸군..”이라고 할까?) 사실은 이런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우리는 자본주의 경제와 근대국민국가 사이의 관계를 새삼 되짚어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것인데도 말이다. 그리고 만약 이런 질문을 효과적으로 제기했더라면, 그들은 사실은 지난 “자유시장 자본주의” 시절에 국가가 후퇴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도 있었을 것이며 이에 따라 좀 더 심도 있게 논의를 끌고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중국의 부상도 사실은 이러한 필연성 속에서 조명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이것은, 어느 특정국이 새로운 패권국으로 성공적으로 부상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중요할 수 있겠지만(그리고 실제로도 중요하다), 일반적으로는, 그런 틀에 입각해서는 중국의 성공여부란 기껏해야 중국의 국가관리들의 성공적인 정책수립-집행의 문제로 축소된 채로 사고될 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중국 관리들이 청렴결백하고 사심 없이 열심히 정책을 수립-집행하면, 과연 중국은 세계 자본주의의 새로운 패권국으로 우뚝설 수 있을까? 그리고 설령 그렇게 우뚝 선다 해도, 이제 중국은 패권국이므로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을까?

이는 쉽게 말하면 이런 거다: 마음씨 좋게 먹고 똑똑하게 살면, 과연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있는가? 그리고 성공한 부자는 뭐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사정을 그렇게 만드는 그 어떤 힘을 우린 흔히 “사회 구조”라고 부르며, 오늘날 개인의 행위를 규정하는 가장 유력한 구조는 “자본주의”다. 이러한 구조는, 거기 속한 하나의 개체가 (그 어떤 기준에 비춰)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와는 별도로, 그 자신의 재생산과 관련된 고유의 문제를 갖는데, 이는 “글로벌”한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The Economist}가 말하는 대로 오늘날 “국가 자본주의”가 부상하고 있다면, 그것이 유의미한 것은 하나의 개별 국가의 정책적인 차원보다는 바로 이와 같은 글로벌한 차원에서다.

곧 오늘 각별히 부각되고 있는 국가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재생산과 관련해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것이 중요한 질문이다. 이것은 미국의 헤게모니가 중국으로 넘어갈 것이냐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의미 있다.

[(뻔한) 결론] 마르크스를 공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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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라덴의 죽음과 미국, 파키스탄

빈 라덴의 죽음에 대해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봤다.

– 오사마 빈 라덴의 죽음. 그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가 사살되고 얼마 후, “미군에 사살된 것이 빈 라덴 최후의 승리”라는 제목의 기사를 봤다. 그때는 이 기사가 참 좋다고 생각했다(링크: 프레시안). 분명 좋은 포인트를 잡아내고 있는데, 어딘지 좀 부족했다.

– 아무래도 그를 죽인 주체, 즉 미국이라는 국가는 그를 죽임으로써 무엇을 노렸던 것인가를 먼저 물어야 할 것이다. 오사마 빈 라덴을 만약 누군가가 죽인다면, 그게 누구여야 할까? 음, 주관식은 너무 뜬금없나. 객관식으로… 오바마와 부시 중에서 누가 죽이는 게 더 ‘자연스러워’ 보일까? 아마도 열명에 아홉은 부시라고 대답할 것. 따라서 이번 ‘작전’을 두고, (우리로 치면 노무현이 집권하는 동안 노동자들에게 보인 태도와 비슷하게) 오바마의 (부시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진짜 정체’가 드러났다고 흥분하는 것도 지나친 게 아니다(링크: 레프트21).

– 뭐, 좋다. 오바마 행정부의 제국주의적 본질, 다 좋다. 근데, 왜 ‘굳이’ 죽였을까? 부시도 후세인을 죽이지 않았는데. 죽이지 않고 재판에 부쳤는데… 처음엔 이런 의문이 꽤 컸는데, 생각해보니까, 일단 빈 라덴의 은신처를 덮치는 작전을 수행하기로 한 이상 죽이는 것은 불가피했던 게 아닐까 싶다. 이렇게 보면, ‘생포할 수 있었는데, 왜 죽였느냐’는 일종의 ‘생트집’ 같아 보인다. (생각해보면, 빈 라덴이 생포당하는 것은, 미국으로서도 골치아픈 일이겠지만, 알카에다 입장에서도 그다지 좋을 게 없어 보인다. 만약 그를 미군이 생포하려 했다면, 다른 조직원이나 빈 라덴 자신이 이를테면 그 은신처를 폭파시켜 자폭하지 않았을까.)

– 따라서 문제는 다시: 왜 그럼 미국은 빈 라덴의 은신처를 덮치는 작전을 수행했는가. 아무래도 여기서 미국 내부 사정을 떼놓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돈’에 대한 고려가 단연 핵심. 예산 문제인데, 2007년 이후 국민경제 전체적으로는 물론이고 특히 국가재정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음이 드러나고 있는 미국 국가로서는 국방비 감축 없이는 현재의 위기를 타개할 수 없겠다는 판단이 크게 작용했을 것. 마침 아프간/파키스탄에서 발을 어느정도 빼고 싶었는데, 이번 빈 라덴의 사살은 그것을 위한 좋은 구실이 되었을 게다. “자, 이제, 테러의 원흉이 죽었으니, 우리 이제 발을 (조금은) 빼자!” (링크: 레프트21)

– 그런데 재밌는 건,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오바마가 아주 그냥 ‘현자’로 보이기도 한다는 점(링크: 프레시안). 그리고 이 링크된 이 기사에서도 시사되듯이, 아프간/파키스탄/이라크 주둔군 감축에 대한 현재의 논란은 곧, 미국의 전반적인 군사전략의 변화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까지도 키우고 있는 실정임(링크: POLITICO).

– 다른 한편, 현재의 사태를 파키스탄의 입장에서 보는 것도 중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파키스탄 민중과 정권을 잡고 있는 세력을 구분해야 함. 기본적으로 파키스탄의 집권세력들에게 빈 라덴은 엄청난 ‘경제적’ 의미를 갖는다.

[출처: 여기 (근데 이렇게 pdf 파일의 일부를 내맘대로 복사해 붙여도 되나 몰라;;)]

보다시피, 파키스탄은 미국으로부터 현재 엄청난 원조를 받고 있는데, 9/11 이전에는 한동안 원조가 끊기다시피 한 상태였다는 것. 그 전에도 한동안 원조가 꽤 있었다는 것도 재밌다. 바로 구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 말하자면, 파키스탄의 권력자들 입장에서는, 자기들 지역을 소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그들 자신에게는 엄청난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 이쯤 되면, 9/11 직후 파키스탄 입장에선 빈 라덴한테 “와우~ 여기 은신처가 있습니다. 어서옵쇼!”라고 하는 게 합리적인 게 아니었을까? ㅎㅎ (링크: 프레시안) 결국 미국과 파키스탄 사이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줄다리기는 이런 관점에서 봐야 한다(링크: 프레시안).

– 여기서 다시, 그런 집권세력들의 이해관계가 해당 지역의 민중들의 이해관계와 얼마나 배치되는가가 여실히 드러난다. 오히려 이 집권세력들은, 어떤 면에서는 그와 반대편에 서있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과 짝짝꿍이 맞아, 실체도 불분명한 종교적 ‘대의’와 관련된 거창한 레토릭이나 민족주의적 감정 등을 민중들 사이에 만발하도록 많은 역량을 쏟아붓고 있는 것.

– 이런 상황은 서방의 ‘제국주의’적일 뿐 아니라 ‘오리엔탈리즘’적인 언론의 먹잇감이 되기가 당연히 매우 쉽다. 이런 데서는, 평소 고상한 논조를 자랑하는 The Economist도 예외가 아니다(링크: The Economist). 하… 그러니까 니들 눈에는 파키스탄 사람들은 음모이론에나 휘둘리는 덜떨어지고 한심한 존재로 보인다는 거잖아!!!

– 여기까지 읽었다면, 대충 빈 라덴, 미국, 파키스탄과 관련해서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어느 정도는 이해되리라 봄. :) 어쨌거나… 이제 얼마 있으면 알라스카에서 빈 라덴 봤다는 사람도 생기겠구만. 즉 그도 이제, Elvis Presley나 Jimmy Hoffa 급의 ‘레전드’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겠다 ㅋ (링크)

《이코노미스트》가 ‘경제학 제국주의’에 반대를?

만약 《The Economist》가 ‘경제학 제국주의'(economics imperialism, 지금부터는 EI)에 반대한다면, 그건 아주 놀라운 일일 것이다. EI란, 마치 현실의 제국주의에서처럼, 경제학이 그 특유의 방법론을 가지고 여타의 사회과학 분야들의 고유의 영역들을 침범하는 것을 말한다.

아래 글은, 요즘 《The Economist》에서 야심차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운영중인 블로그 중 하나에서 옮겨온 것이다(링크).

But I do think that this argument points to an overarching cultural trend, namely an increasing tendency to use the language of economics when talking about any social or political issue whatsoever [인용자: 이게 바로 ‘경제학 제국주의’다]. Over the past 15 years, a number of gifted popularisers of economics have helped show laymen how to think about a lot of disparate subjects using economic tools and styles of thought. Paul Krugman was among the first of these; he has been followed by Stephen Levitt, Charles Wheelan, Tim Harford, and many others. But it seems that when Mr Krugman started writing columns suggesting how to look at political and social issues from an economist’s perspective, he didn’t anticipate that people might decide that economic language and styles of thought are always the best way to think about everything.

와우… 재밌다. 여러모로.

첫째로, 위 구절에서 ‘EI’가 매우 제한적으로만 의미있음을 인정하고 있다는 게 재밌다. 이는 매우 쉽게 EI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둘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구절이 EI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다는 것도 재밌다. 저자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바로 그는… EI를 일반화한 ‘주범’ 중 하나인 폴 크루그만(Paul Krugman)의 (매우 애매모호한) ‘진심’을 언급함으로써. 즉 PK의 진심은 그게 아니었는데, 뭣도 모르는 ‘애들’이 PK를 어설프게 따라하다가 이른바 ‘EI’라는 해괴한 습관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위 블로그 포스트를 쓴 기자가 PK 말고 다른 저자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할지도 매우 궁금하다. 위에서 언급되고 있는 스티븐 레빗, 팀 하포드, 찰스 휠란 등은,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인기있는 경제학 저자들로, 각각 『괴짜경제학』 씨리즈, 『경제학 콘서트』 씨리즈, 『벌거벗은 경제학』 등을 냈다.

셋째로, EI에 대한 ‘비판’이 《The Economist》에 의해 위와 같이 비록 ‘제한적으로나마’ 나올 수 있다는 것도, 결국은 2007/08년 이후의 범세계적 위기의 결과일 것이라는 점도 재밌다.

원래 위 글은… “환자들은 소비자가 아니다”라는 크루그만의 4월21일자 칼럼에서 비롯된다(링크). 잘 알려져있다시피 크루그만은 미국 의료보험개혁에 매우 헌신적인 경제학자다. 이에 대해 앞서 인용한 《The Economist》 블로그의 한 저자가 논평을 했고(링크), 역시 같은 블로그의 다른 저자가 반론(위 인용부분이 속한 포스트)을 펴는 식으로 논의가 전개되었다. 심심하신 분들은 처음부터 한번 쭈욱 훑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참고로, 나도 예전에 이 블로그에 경제학 제국주의를 비판하면서, 『괴짜경제학』을 언급한 바 있다(링크1, 링크2).

조정환 선생의 ‘인지자본주의’ 출간에 부쳐

조정환 선생께서 『인지자본주의』라는 책을 내셨다고 한다. 네그리•하트의 『제국』이 나온 것이 2000년이니까, 그로부터만 쳐도 10년이 넘는 기간에 걸친 연구와 논쟁의 성과라고 할 수 있겠다.

책을 안 읽어봤지만 그간 알고 있던 그의 주장들로 미뤄 내충 무슨 얘길 하려는지는 짐작이 간다. 다른건 관두고, 나는 이 분이 자신의 주장을 마르크스와 관련짓는 것이 심히 못마땅스러울 뿐이다. 만약 그러지만 않았다면, 그는 전혀 나의 관심 바깥에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특이한 것은 그가 ‘인지자본주의’라는 테마를 마르크스와 관련시키기 때문이지, 만약 ‘인지자본주의’ 자체에 대해 말한다면 이론적으로나 실증적으로나 조정환 선생보다 훨씬 정치하고 앞선 논의들을 내놓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해, 널리고 널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마르크스를 올바르게 제시하고 있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마르크스의 가치론을 그는 전면 부정하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의 표현을 빌면, 그는 “노동자를 더 고용해 그들이 창출하는 ‘잉여가치’에서 자본을 축적한다는 마르크스적 해석이 통하지 않는다”라고 보기 때문이다(링크). 이런 해석에 대해, 그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수많은 반론들을 내놓았고, 그 대표적인 논자가 경상대의 정성진 교수다. 지금은 이미 오래전 일이지만, 그의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다. 어째서 조정환 선생은 마르크스의 핵심 명제를 부정하면서도 스스로 마르크스주의 진영에 이름을 올리는 것을 허용하는 것일까? 기본적으로 조정환 선생께서 위와 같은 ‘과감한’ 해석을 내놓는 것은, ‘세상이 바뀌었다’라는 판단 때문이다. 이를, 《한겨레》의 기사는 “상업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에 이은 제3기 자본주의로서의 ‘인지자본주의’”라고 표현했다(링크). 무슨 얘기냐면, ‘어차피 이런 것에 대해 마르크스는 전혀 몰랐을 테니까’라는 ‘알리바이’를 조정환 선생은 자의적으로 마르크스에게 부여한 뒤, 그는 점잖게 ‘그래도 나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선언하는 결연함을 보이는 것이다. 음, 멋지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그런 것을 몰랐다고 식의 발언은 매우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역사를 다룰 때 지극히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당연히 마르크스는 iPhone에 대해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iPhone은 8년 전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도 몰랐다. 그러나 ‘iPhone을 몰랐다’라는 말과 이를테면 ‘잉여가치가 더 이상 노동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지식에서 나오는 세상에 대해 몰랐다’라는 말은 전혀 다른 것이다. 과연, 마르크스가, 지식이 가치의 생산에서 행하는 중요한 역할에 대해 몰랐을까? 이것은 마르크스만에 대한 얘기는 아니다. 즉 19세기 중반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선진적인 지식인들이 ‘지식’이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을까? 이에 대해 지금으로선 다음과 같은 당시 《The Economist》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족하다.

“물질세계에 대한 지식과, 그것을 노동에 의해 적용시키는 기술부의 원천이다” (The Economist, August 30, 1851). (강조는 나의 것. 여기서는 ‘노동’이 아니라 ‘지식knowledge’과 ‘기술skill’이라는 단어가 핵심이다.)

혹시 조정환 선생은, 위와 같은 구절에 대해 마르크스가 동의했다고 생각하시진 않겠지? 참고로, 《The Economist》는 마르크스가 그렇게도 혐오했던 당시의 경제학자들, 즉 이미 자본가들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과학자라기보다는 이데올로그에 지나지 않는 집단에 의해 ‘자유무역을 증진시키기 위해’ 창간된 잡지다.

(물론 내 얘긴, 마르크스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는 게 절대 아니다. 세상이 바뀌었다면서 ‘가치론’이 유효성을 잃었다고 하는 것은 매우 성급한 태도라는 것이다. 이미 이 블로그에서도 ‘가치론’의 중요성에 대해선 몇 차례 말한 바 있다. 조정환 선생이 말하는 것과 같은 ‘세상의 바뀜’은 가치론에 대해 새로운 과제를 제기하는 것이지—물론 위에서 말한 대로 흔히 사람들이 ‘새로운 과제’라고 여기는 것들이 실제로는 그다지 새로운 게 아니다—결코 가치론을 부정하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왜 기업이 존재하는가?”: Coase의 100살 생일에 부쳐

‘거래비용’의 관점에서 ‘기업의 본질’에 대해 설명했던 코우즈(Ronald Coase)가 12월29일에 100살이 된다고 한다.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의 소유자인 이 할아버지는 내년 초에 중국에 대한 책을 하나 낼 예정이시란다. 대단하다. (코우즈에 대해서는 이 [링크]를 참조.)

어찌되었든 사람이 건강하게 오래 살고 있다는 것은 축하해줄 일. 그래서인지 <이코노미스트>도 최근호에서 코우즈의 ‘업적’을 되씹는 방식으로 그의 건강과 장수를 기리고 있다. [Why do firms exist?]

기사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기업이 존재하는 이유는 기업을 구성함으로써 거래비용이 엄청나게 낮아지기 때문이라는 것.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는가? 난 그냥 웃는다. 에… 덧글 중에서는 ‘D. Sherman’이라는 분의 얘기가 좀 맘에 든다. (에에… 나도 하나 달았다. 아니, 빼먹은 말이 있어서, 연속으로 두 개 달았다;;;)

[200908] 경제학이 나아갈 길

내친김에… 앞서 글과 같은 매체에 실렸던 글 하나 더. 2009년 8월에 썼다. 아래 글에서 묘사된 <이코노미스트> 지상의 논쟁이 문득 떠오른다. 상당히 치열했고, 그런 점에서 우리가 본받을 만한 것이었다.

글의 말미에 ‘국가의 역할’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적어도 이때만 해도 여러 논쟁들 중에서 국가의 역할과 위상이 과감하게 인정되는 분위기였는데, 최근들어 많이 바뀌고 있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2008년 9월 이후 엄청난 액수의 돈(물론 그 돈은 모두 국민의 세금에서 조달되는 것으로 보면 된다)이 망가진 금융시스템의 구출에 쓰였고, 또 이를 위한 ‘정당성’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금융시스템은 국가의 일부다'(당시 영국 총리였던 고든 브라운의 말)라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보라. 이를테면 최근 우리나라에 와서 논쟁을 벌이기도 했던 크루그만(Paul Krugman)과 나이올 퍼거슨(Niall Ferguson)을 보라. 크루그만이 대체로 케인스주의에 입각해서 국가의 역할을 과감히 인정하고 있는 반면, 퍼거슨은 (속류) 고전파적인 입장–이는 곧 케인스의 정의에 따른 고전파를 의미한다–에서 거의 ‘야경국가론’에 다름 아닌 논조를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크루그만과 퍼거슨의 논쟁은 2008년 4월부터 시작되었는데, 논쟁 초기엔 퍼거슨도 국가의 역할에 심각하게 의문을 달지는 않았었다. 그의 입장은 시간이 가면서 묘하게 바뀌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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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이 나아갈 길

1. 최근 <이코노미스트>가 현재의 범지구적 경제위기와 관련, 경제학을 본격적으로 문제삼고 나섰다. 이 주간지는 7월 18일자에서 “경제거품 중에서 경제학의 명성에 낀 거품만큼 장관을 연출하며 터진 것도 없을 것이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일련의 논쟁적인 기사들을 무려 6면 이상에 걸쳐 냈다.

흔히 경제학자를 “세속의(worldly) 철학자”라고 하는데, 이를 비꼰 게 분명한 “다른 세상의(other-worldly) 철학자들”이라는 한 기사의 제목이 보여주듯, 이번 비판은 경제학의 비현실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재밌는 것은 이 기사들이 경제학자들을 “수학적 모형화”와 “효율시장가설”의 맹신자로 묘사하면서, 그런 경향에 반대하는 크루그만(Paul Krugman)이나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 같은 또 다른 경제학자들의 견해에 크게 기대고 있다는 점이다.

이 기사들은 곧바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이 잡지는 3주 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루카스(Robert Lucas) 시카고대 교수의 반론기사를 이례적으로 한 면 가득 내보내기에 이르렀다. 동시에 같은 호의 “독자편지”란은 3주 전의 기사들과 관련된 의견들로만 채워졌다.

2. 현대경제학의 발상지답다고 해야 할까? 꼭 <이코노미스트>가 아니라도, 영국 종이매체엔 경제학의 잘못을 꾸짖는 기사들이 연일 끊이지 않고 있다. 이때 매체들은 단순히 여러 의견들의 전달자에 그치는 게 아니라 각기 꽤 명확한 “입장”을 가지고 다양한 의견기사들을 통해 적극적으로 논의를 이끌고 있다. 특히 문제의 성격상 가장 활발하게 논쟁에 참여하면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코노미스트> 같은 경제지의 경우, 그 입장의 “배경”도 커다란 흥밋거리다.

<이코노미스트>는 자유무역 옹호, 보호주의 반대라는 기치를 내걸고 1843년에 창간됐다. 그 시작부터 “정치적”이었던 셈인데, 그 당시엔 대기근을 겪던 아일랜드에 식량원조를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정도로 자유방임 원칙에 충실했다. 1980년대엔 현재 신자유주의라 불리는 경제・정책이념의 화신인 레이건과 샛처 정부에 호의적이었다.

이와 같은 과거 행적을 놓고 볼 때, 앞서 소개한 <이코노미스트>의 경제학 비판은 언뜻 보면 그 기존입장에 배치되는 것 같다. 과연 이 잡지가 한때 자신이 옹호하던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비판하고, 케인스주의자이자 오바마 지지자이며 “복지국가의 수호자”를 자임하는 크루그만 같은 인물에 의존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좀 더 폭넓게 말하면, 현재 세계적으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는 전국민의료보험체계의 필요성을 대체로 인정하고 영국 국내정치에서는 보수당보다 노동당에 호의적인 모습을 종종 보이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러나 이런 입장은 2009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보수당 지지 쪽으로 급선회한다. 그리고 이런 입장변화를 주도한 것이 ‘황색언론’의 대명사 <더 선>(The Sun)이었다는 사실은, 그 입장 변화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것 같아 매우 흥미롭다.]

3. 그 해답은 궁극적으로는 20세기 말에 닥친 이데올로기의 혼란과 재편에서 찾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현실사회주의 붕괴는 기존의 좌파에 치명적인 타격을 날렸지만, 동시에 이 잡지가 떠받드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이념적·실천적 공간을 넓혀놓았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번 경제위기를 전후해 제기된 이슈들, 즉 몇몇 거대기업들의 국유화나 중앙은행의 역할, 경제학의 향후 재편방향 등을 둘러싸고 <이코노미스트>나 <파이낸셜 타임스>―소유구조로 보면 이 둘은 거의 하나나 다름없다―가 내놓는 의견이 전통적으로 노동당 성향인 <가디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는 것은,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조금 오래된 우스갯소리를 하나 하자면, 한 번은 <이코노미스트>가 당시 이탈리아 총리후보였던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를 무자격자라고 비판했다가 그로부터 “이코뮤니스트”(Ecommunist)라는 무시무시한(!) 별칭을 얻기도 했다.

4. 이런 사정을 두루 생각하면, 현재 <이코노미스트>가 제기하는 종류의 것이 경제학 자체에 대한 내재적이고 심도 있는 비판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하지만 학문이란 것도 결국엔 현실의 반영이고 그 다양한 이해관계들의 대립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니, 이는 한편 당연한 듯도 싶다.

그렇다면 역설적이게도, 경제학이 비현실적이라는 데서 출발했지만 결국 그것은 “세속의” 학문임을 보였다는 게 <이코노미스트>의 경제학 비판의 미덕이라고 해도 될까? 나아가 그것이 경제운영에서 국가의 역할을 크게 인정하고 있는 것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분위기를 계속해서 끌고가지 못한 것은 좌파들이 크게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끝)

Economist on 중국 노동자/노동시장

<이코노미스트>에 재밌는 기사가 났다. 중국 노동자/노동시장에 대한 기사다(링크). “The rising power of the Chinese worker: In China’s factories, pay and protest are on the rise. That is good for China, and for the world economy”라는 제목만 봐서는 마치 중국에서 노동자들의 권익 향상을 반기는 것 같지만, 잘 보면 그렇지 않다. 어쩌면 이 기사가 전해주고픈 핵심적인 철학과 메시지는 다음과 같은 마지막 단락에 들어있는 것 같다.

캐임브리지 경제학자 고 존 로빈슨(Joan Robinson)이 언젠가 썼듯이,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비참함이란 착취당하지조차 못하는 비참함에 비할 바가 아니다”. 1962년에 씌인 이 재치있는 구절은 동남아시아의 과소고용(underemployment) 현실에서 자극받은 것이었다. 그때로부터, 자본은 그 지역과 그 북쪽의 거대한 이웃[중국]에서 노동자들을 분주히도 “착취”해왔으며, 이는 그들에게 크게 이익이 되었다. 이제 자본이 그들에게 투자할 때가 됐다.

1. 한 가지 재밌는 것은, “착취”라는 말에 따옴표를 침으로써 끝끝내 그 용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 하지만 이건 뭐 아무래도 좋다. 나는 솔직히 저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직까지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저 경악스러울 따름이다. 멀쩡한 사람들이 굶어죽는 것을 보며 비탄에 가득차서, “차라리 저들이 자본에 착취라도 당했더라면 저보단 나았을텐데”라고 읊조리는 것이 곧장 “자본에 착취당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라는 명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2. “이제 자본이 그들에게 투자할 때가 됐다”란 또 무슨 소린가? 기사 전체를 보면 이는, 중국 노동자들도 이제는 “소비”를 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려면 그들의 소득수준도 높아져야 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선 현재 불거지고 있는 노사갈등이란 필요악이라는 뉘앙스도 풍기고 있다. 이것이 위 기사가 말하는 자본이 노동자에게 하는 “투자”인가? 넌센스다. 이게 왜 “투자”인가? 노동자들이 투쟁을 통해 얻어낸 것이지!

자본은 그저, 주어진 상황의 (그 결과가 어떨지는 미리 정해지지 않은) 우연한 전개를, 즉 그런 사태의 추이에 따른 외적 강제를, 그 자신 내적 필연성으로 끌어안을 뿐이다. 위 경우, 애초 자본은 미래의 소비자인 노동자에게 “투자”한다는 의미에서 그들에게 “자발적으로 양보”한 것이 절대 아니다. 노동자들의 투쟁에 의한 강제, 또는 자본이 결코 의식적으로 지킬 필요가 없는 모종의 경제적/사회적 논리에 의한 강제(이를테면 노예라 하더라도 계속 굶긴 채 일을 시킬 수는 없다는 식의)를, 어쩔 수 없이,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마치 애초부터 거기에 있었고 또 따라서 자신은 그것을 자발적으로 받아안는다는 듯이 받아들일 뿐이다.

3. 사실은, 위 기사에서도 시사되는 바와 같이, 자본이 정작 어떤 “투자”를 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대상은 바로 “중국 국가”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값싼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데 걸림돌이 되는 제반 사회제도들을 중국 정부가 재정비하길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엔 현재 시행되고 있는 중국의 이주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는 것은 물론, 위 기사엔 나오지 않았지만 도시를 중심으로 한 제반 사회적 인프라 정비까지 포함될 것이다.

바로 이런 대목에서 끝끝내 드러나고야 마는 것은, 결국 “자본의 본성”이다. 즉 자본은 애초부터 노동자의 “복지”나 그들의 “소비수준” 내지는 “삶의 질”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값싸고 순응적인 노동력의 안정적인 공급“일 뿐. 그들은 오직 그것을 위해 중국 정부를 들볶고, 필요하면 이동도 하고 그러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사항들이 매우 잘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위 기사는 매우 좋은 기사, 한번쯤 읽어볼만한 기사다.

<이코노미스트>와 <파이낸셜 타임스> on 천안함 침몰

Their Word is Not Enough, The Economist, Jun 7th 2010.


국내에서 이번 천안함 문제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거나 정부의 발표와는 다른 얘기를 하면 ‘괴담’이니 뭐니 하면서 ‘헛소리’로 일축되곤 하는데, 정부 관료들도 숭배해 마지않는 ‘권위있는’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서도 그 ‘괴담’을 퍼뜨리기로 작정을 하고 나선 모양이다.

요새 나오고 있는 미국 잠수함에 의한 격침설 등에 비하면 대단할 것도 없겠지만(사실 이 ‘격침설’도 알려지지만 않았을 뿐 사건 초기부터 꾸준히 제기되던 것인데), 《이코노미스트》 특유의, 한발 빼고 훈수 두는 듯한, 저 다소 무책임해 보이는 문체로 전해지는 천안함, 그리고 그 이상의 이야기. 재밌다.

천안함에 대한 위와 비슷한 문체, 비슷한 태도의 글로는 다음의 《파이낸셜 타임스》 기사도 참조할 수 있다.

Sinking underlines South Korean view of state as monster‘, Financial Times, Apr 1st 2010.


그러니까 뭐냐면… 얘들이, 사태를 비판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사태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다. 그러나 문제는, 이 비판정신은 어떻게 보면 도(?)를 지나쳐서, 《이코노미스트》나 《파이낸셜 타임스》의 전체 논조에 비춰보면 다소 모순적으로 보이기도 한다는 얘기. 결국 이 두 매체는, 간단히 말하면, 자기들한테 별로 안 중요한 사안들에 대해서는 선택적으로 ‘비판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자기들한테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취하는 애매모호하고 다소 보수적이고 억지스런 태도를 보상한다는 거다.

이런 의미에서 《이코노미스트》나 《파이낸셜 타임스》, 어째 《조선일보》 같은 애들이랑 크게 달라보이진 않는다? ^^

주주 자본주의 vs 이해당사자 자본주의

‘A new idolatry’, The Economist, Apr 22nd, 2010. [링크]
다시 말해, 주주가치를 강조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기업주가의 단기적 증가를 주주가치의 척도로 쓰는 게 진짜 문제다. 역설적이게도, 주주들 자신이 이와 같은 혼란을 퍼뜨리는 데 일조했다. 헤지펀드는 말할 것도 없고 많은 기관투자자들이, 말안듣는 기업메니저들을 기업 거버넌스와 임원봉급에 대한 논의의 장으로 끌어들이기보다는 단기이윤과 주가상승을 숭배했던 것이다.

(특히 미국에서) 경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더 많은 권한을 주주에게 주고 또한 그들로 하여금 이런 권한을 행사하도록 북돋는다면, 그들은 물론 그들이 고용한 경영자들도 좀 더 장기적인 관점을 갖게 될 것이다. [. . .] “주주자본주의와 이해당사자 자본주의 사이의 전쟁이란 그저 말뿐인 전쟁에 지나지 않아요. 우린 실제로는 주주자본주의를 시도해보지도 않았기 때문이죠.” 미국 최대의 공공연금기금인 캘퍼스(CalPERS)의 기업 거버넌스 감시책임자 앤 심슨(Anne Simpson)은 말한다. “주주가치[라는 패러다임]을 포기하기보다는, 주주 자본주의를 제대로 한 번 해볼 기회를 줘보자는 거죠.”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재밌는 기사가 났다. 아마도 앞으로 한국경제를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이냐, 다시 말해 한국경제의 ‘모델’에 대한 논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주주 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니 ‘이해당사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니 하는 말들이 전혀 낯설지는 않을 터.

대통령까지 나서서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라고 토로할 정도로 거대기업의 영향력이 막강한 오늘날, 기업의 주인이 누구냐는 물음에 대한 가장 교과서적인 대답은 바로 ‘주주’일 것이다. 재밌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한 개인은 직간접적으로, 즉 직접적으로 주식을 구입하여 보유함으로써 또는 은행에 예치해둔 돈이 주식에 투자되는 등의 간접적인 방식을 통해 (때때로 자기도 모르게) ‘주주’가 되어있을 확률이 적지 않다. 주주 자본주의란 바로 이와 같은 현대사회의 변화를 반영해 나타난 개념으로, 주주가치를 극대화하는 게 곧 대중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하지만 뭐, 말이 그렇다는 거고… 주주 자본주의의 현실은 우리가 이제껏 목격한 대로 그다지 명랑하지만은않았다. 명목상으로야 기업의 주인이라고 떠받들리던 개별주주들이 기업의 의사결정에 이렇다할 영향력을 미칠 수단은 실질적으로 전무했고, 주로 몇 년 단위의 계약으로 고용되는 이른바 전문경영자(CEO)들은 주주가치를 극대화한다는 명목으로 사실상은 단기적인 주가를 높이는 데만 혈안이 되어 결과적으로는 스스로 엄청난 액수의 스톡옵션을 챙기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기업의 재무구조는 엄청나게 손상을 받았고, 그 결과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겪고있는 경제대란의 전조였던 엔론(Enron)의 파산 등이었다.

거품이 터지고 위기가 현실화되기 전까진, 어쩌면 주주들은 결과적으로 이익을 봤다고도 할 수 있을 거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기업을 둘러싼 다른 이해당사자들, 즉 기업에 고용된 직원, 부품 공급처, 도매상, 소비자,이 기업이 위치한 지역 커뮤니티, 나아가 해당 사회 자체… 이 모두가 ‘주주가치’를 위해 희생되어야 했다. 이를테면 ‘주주가치’—여기선 ‘단기적 주가 극대화’라고 읽혀야 한다—라는 이상을 위해, 기업은 노동유연화를 단행했고 따라서 직원들은 고용불안정에 시달려야 했다. ‘이해당사자 자본주의’란, 바로 이렇게, 기업이란 단순히 주주의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이해당사자들의 공동체임을 인식하고, 기업이 극대화해야 하는 것은 따라서 주주가치가 아니라 이해당사자들의 공동의 이익이라고 보는 시각을 일컫는다.

‘주주 자본주의’와 ‘이해당사자 자본주의’는 흔히 영미형 자본주의와 독일형 자본주의라고 각각 불리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이 둘의 대립은 레닌(V.I. Lenin)이나 심지어 그 이전의 리스트(F. List)에까지 소급시킬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이 대립이 특히 학자들과 정책가들 사이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97년 이후의 IMF의 주도로 이뤄진 경제재편과 관련해서가 아닌가 싶다.

아… 나름 엄청난 논쟁이 있었다. 그렇다면 결과는? 뭐 대충 평행선을 달리다 끝난 것 같다. (-_-) 따지고 보면 우리가 흔히 ‘진보적’이니 ‘좌파적’이니 하는 입장들은 ‘주주 자본주의 vs 이해당사자 자본주의’라는 구도로는 포착되지 않는 게 일반적이지만, 굳이 이런 구도를 고수하자면 ‘이해당사자’ 쪽이 더 그럴싸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소액주주운동’도 ‘진보적’ 운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두고 보면, ‘주주 vs 이해당사자’ 논쟁은 말하자면 크게 봐서 ‘진보 내부의’ 논쟁이었다고 보는 게 맞는 평가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결국 자기들끼리 치고받다가 끝났단 건데…… 물론 그러는 사이에, ‘주주 자본주의’를 통해 진정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 이를테면 재벌들이 실속은 다 챙겼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쳇.

아… 그러니까 주주냐 이해당사자냐 하는 논쟁과는 별개로… 세상은 ‘주주 자본주의’쪽으로 의연하게 흘러갔고, 그러다가 롱텀 케피탈 메니지먼트(LTCM)와 엔론이 넘어졌고, 각종 기업회계비리가 터졌으며, 그리고…… 공포의 2007년 왔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반 뒤, 지난 주 위와 같은 《이코노미스트》 기사가 났다!

내용? 뭐 보시는대로. 저 ‘주주 자본주의’ 옹호자들의 기만적인 ‘눈가리고 아웅’을 보라. “주주가치를 강조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기업주가의 단기적 증가를 주주가치의 척도로 쓰는 게 진짜 문제다“라고? 너네 반대하는 쪽에서 그런 얘길 여태 안 했냐? 그걸 이제 알았어?

한편 여기서 재밌는 것은 캘퍼스(CalPERS)라는 곳이 ‘주주 자본주의’를 옹호하고 있다는 것. 캘퍼스는 미국에서 가장 큰 공적연금기금으로, 일부 진보적인 사람들은 바로 이런 대규모 공적연금 즉 결국엔 대중들의 푼돈(?)이 모여 이뤄진 큰 기금에 대한 통제권을 손에 넣음으로써 그것으로 기업의 주식을 사 궁극적으로 기업들을 통제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바로 이런 생각에 의한 자본주의 재편 비전을 ‘수탁자 자본주의(fiduciary capitalism)’라고 부른다.

이쯤 되면 대충 위 기사를 둘러싼 배경그림이 그려진 듯? 에고 그만쓰고 집에 가야지…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