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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이해 비판 (2)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9권 제1호(2012년 봄)에, 나의 논문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이해 비판: ‘비물질노동’의 개념화와 측정을 중심으로”가 실렸었다. 앞서 밝혔듯, 이번에 토론회를 준비하면서 이 논문을 간단하게 요약했는데, 다음과 같다(한글초록 및 기타 추가적 정보는 여기를 참조하시길).

[※ 추가(2014년 2월 12일): 원하는 분이 있어서… 전문링크]

먼저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인지자본주의론의 현재
2. 소극적 비판: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인식에 대하여
_(1)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비판의 개요
_(2) 인지자본주의론이 보는 가치이론: 모호하거나 단순하거나
3. 적극적 비판: ‘비물질노동’을 가치이론적으로 다루기 위한 메모
_(1) ‘비물질성’, 노동의 특정 유형의 성격인가 노동 자체의 성격인가
_(2) 단순 비교 대 역사적 형성
_(3) 가치이론의 기반: 측정가능성 대 비교/동등화
4. 맺음말

보시다시피 이 글에서 핵심은 2절과 3절이다. 따라서 아래 요약은 이 두 절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1절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언뜻 보면 1절은 그냥 구색 맞추기 위해 들어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부분을 읽은 독자들은 아마도 조정환이 어떤 종류의 연구자인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왜냐?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자신이 마치 ‘인지자본주의’에 대한 기존의 논의를 집대성하고 나아가 그것을 한걸음 더 진전시키고 있다는 듯이 묘사하지만, 실상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제껏 관련 논의를 국내에 소개해온 선구자들을 단한번도 언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이건 적어도 ‘예의’의 문제다), 관련된 세계적 논의들을 충분히 검토하지도 않았다(이건 적어도 ‘성실성’의 문제다). 이러한 행태로부터 드러나는 조정환의 ‘의지’는 무엇인가? 자신을 인지자본주의론의 대표주자로 내세움으로써 자신이 가진 기존의 지적 권력을 유지하려는 추악한 의지, 자신의 책을 팔아줄 독자들을 잃을지 모른다는 가련한 두려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로써 나는, 조정환이 어떤 글에서 전희상에 대해 했던 부당하고 모욕적인 표현을 그에게 되돌려준다. 더구나 특히 이 후자의 경우엔, 조정환이 그리도 혐오하는, ‘경제적’ 내지는 ‘가치이론적’ 고려(!)가 개입되었으리라(자, 이렇게 경제학 또는 가치이론은 여러분들의 실생활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부디 두려워 말길). 따라서 나의 비판은, 조정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조정환이 아주 작은 일부로서 포함되어 있는 ‘인지자본주의론’ 일반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조정환은 (당연한 얘기겠지만) 인지자본주의론의 전부도 아니고 대표주자도 아니다. 그렇다고 그가 한국의 (현실적 또는 이론적) 특수성을 상당히 반영한 논의를 내놓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나는 오히려 그가 인지자본주의론을 어떤 면에선 왜곡시키는 것 같기도 하다. 따라서 그가 인지자본주의론과 관련해서 특별히 주목받을 필요는 없다. 이건 그러니까… 김수행 교수가 공황론을 주로 소개했다고 해서 김교수의 입장이 공황론의 전부는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당연하지 않은가? 실제로 과거엔 김교수가 공황론의 대표자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별로 없었던 듯하다. 내가 알기론 김교수 자신도 그렇게 자신을 내세운 적은 없다. 그런데 요샌 조정환이 인지자본주의론의 대표주자인 것처럼 이야기되고 있다. 사람들이 그만큼 게을러졌거나, 조정환의 간이 배밖으로 나왔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제 본격적인 비판을 보자. 애초 나의 주장은 두 부분으로 나눠어 있었지만, 다음에서는 이 둘을 뭉뚱그려 모두 네 개의 주장으로 요약했다.

1. 가치이론에 대한 지나친 단순화/오해. 이것은 마치 {자본론} 제1권 제1장을 읽으면서, “터무니없이 높은 명품가격”을 반박근거로 내놓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즉 여기서 상품가치는 매우 단순하게도 “그 상품을 만드는 데 드는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으로 규정되는데, 이른바 명품의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은 이런 원칙을 거스르는 것 같기 때문. 이에 대해 가장 적절한 반응은, “제3권까지 한번 가봐라”라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자본론}에서 제시된 이론은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고 특히 가장 단순하고 추상적인 최소한의 규정에서 출발해서 점차 복잡하고 구체적인 영역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말해 가치와 가격의 괴리 문제는 계속해서 구체적 규정들이 덧붙여짐에 따라 점진적으로 고려된다는 것이다.

결국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기각은 마르크스의 가치개념/규정을 제1권 제1장 수준, 즉 매우 단순하고 추상적인 차원에서 파악한 채로 이뤄진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이 기각의 근거로 삼는 현상들은 상당히 구체적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부당할 뿐만 아니라, 그런 논리를 받아들이더라도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은 그렇다면 가치이론의 기각이 왜 포드주의 시대(=노동과 자본 간의 “협약”에 기초해 종전보다 현저히 높은 임금수준이 실현된 시대)에 일어나지 않고 지금 일어난다는 것인지 대답해야 할 것이다.

2. 비물질성의 지위. 인지자본주의론에서는 비물질노동을 노동의 새로운 유형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비물질성은 노동의 일반적인 특성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다만 이제까지 가치이론에서는 그런 성격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을 뿐이다. 앞서 밝혔듯 가치이론은 단순/추상에서 복잡/구체로 나아가는 열린 구조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비물질성 문제도 논의의 어떤 단계들에서 차차 고려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항에 주의를 기울일 계기를 줬다는 점에서 인지자본주의라는 문제설정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3. 그렇다면 노동의 비물질성, 나아가 그러한 비물질성이 특히 두드러져 보이는 노동유형들을 가치이론적으로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당연히 제기될 것. 인지자본주의론에서는 예컨대 과학기술종사자나 간병인의 노동과 전통적으로 상정되는 이미지를 가진 노동, 이를테면 볼트와 너트를 맞춰 조이는 기계공의 노동을 대비시키면서, 오늘날 자본주의에서는 전자가 두드러진다고 주장함(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그러나 이런 식의 단순 병치/비교는 마르크스의 방법과 배치된다. 즉 특정 노동들의 병치/비교보다는 “역사적 형성”을 보는 것이 더 유의미한 파악법이다. 과학기술종사자나 간병인을 기계공과 대비시키면 누구라도 그 “인지적 아우라”에 취하기 쉽겠지만, 역사적 형성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의 과학기술종사자나 간병인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기계공의 모습에 가깝다(즉 자본에 고용되어 있다는 것). 이로부터 제기되는 이론적 문제는, 특히 현대자본주의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과학기술노동의 그와 같은 역사적 형성—즉 자본주의화—이 현대자본주의의 재생산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는 것이지, 그것을 근거로 기존 이론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다.

4. 마지막으로, 어쩌면 가장 핵심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측정” 자체에 대해. 인지자본주의론은 오늘날 노동을 둘러싼 여러 환경의 변화 때문에 상품의 생산에 드는 사회적평균노동시간을 측정하는 게 불가능함을 근거로 가치이론의 기반이 사라졌다고 본다. 두 측면에서 반론이 가능하다.

(1) 마르크스 자신도 오늘날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이 제기하는 측정의 어려움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노동일’을 다루는 {자본론} 제8장(불어/영어판 제10장)을 보면, 정해진 노동시간을 야금야금 늘리려는 자본가들의 작태들이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이를 마르크스는 “분 뜯어내기”라고 부른다. 물론 이런 작태들은 한 상품에 들어간 노동시간이 얼마인지를 애매모호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를 자신이 방금 전에(=즉 제1장에서) 내놓은 “직접노동시간에 의한 가치규정” 명제를 철회하는 근거로 삼지 않았는데, 이는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이 상상하듯 그러한 행태들이 마르크스 시대엔 별로 두드러지지 않아서가 아니라(실제로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었다는 게 “노동일” 장에서 마르크스의 요지다), 자신의 가치이론의 체계상(마르크스의 가치이론의 ‘개방성’을 떠올릴 것!) 그것은 고려되더라도 뒤에 가서야 고려될 문제이기 때문이다. 실제 현실에서는 “초과착취”가 매우 일반적으로 이뤄지고 있지만, {자본론} 제1권(부터 제3권까지)에서는 “정상착취”만 전제되는 것과 같은 이치.

(2) 측정 자체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역사적, 정치적, 특히 기술적 사정과 복잡하게 얽혀있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시간에 대한 관념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노동일”이라는 표현 하나만 봐도 금새 드러난다. 마르크스는 이를 “하루 동안의 노동시간”이라는 의미로 쓰지만, 원래 노동일(working day)이란 노동하는 날, 그러니까 “휴일”의 반대말이었다(참조). 즉 노동의 단위가 “하루”였던 시대로부터 “시간”으로 바뀌어가는 사정을 “노동일”이라는 애매한 표현은 반영하는 것인데, 물론 이러한 변화가 기술적 뒷받침 없이 진행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즉 “노동일”이 아니라 “노동시간”이라는 개념이 유의미하려면 실제로 그것을 측정할 수 있어야 하며, 이는 손목시계의 광범위한 생산을 전제한다(물론 “(자동장치로서의) 시계”의 출현의 의의는 단순히 노동시간의 측정 이상이지만). 이렇게 보면, 오늘날의 “노동시간”이 19세기의 시계, 또는 시간관념으로는 측정이 불가능할지 몰라도, 오늘날의 정밀화된 시계, 시간관념으로는 측정 가능하고, 또 끊임없이 측정되고 있다.

다른 한편, 인지자본주의론은 직접적인 노동시간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교류작용들도 오늘날엔 상품가치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 또한 측정 불가능성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다. 물론 오늘날 예컨대 블로그를 통한 광고가 상품가치 형성에 커다란 기여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은 언제나 있어 왔다. 마르크스가 그것을 몰랐을까? 그가 살았던 중기 빅토리아 시대는 그야말로 “유행과 평판의 시대”였다. 그런데도 그가 그런 측면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기본적으로 그의 이론의 미완결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상품의 평판을 측정할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구글 애드센스의 등장은,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오늘날엔 상품가치 형성에 평판이 주되게 참여한다는 뜻으로 읽기보다는, 드디어 “평판”이라는 것을 측정할 수 있는 수단이 등장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비로소, 말하자면 “평판의 정치경제학”을 본격적으로 제기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사실은 “측정”이 갖는 이러한 가변적인 성격 때문에 De Angelis and Harvie는 “측정이란 정치적 범주”라고 말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측정 문제의 본질은, 그것의 기술적 가능성이 아니라 상이한 노동들이 끊임없이 비교되고 또 그럼으로써 동등화된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그리고 이 후자는, 사실 아담 스미스나 헤겔, 마르크스가 공통적으로 주목했던 근대사회의 구성원리이기도 하다.

5. 맺음말. 나의 글이 인지자본주의론에 대한 포괄적인 비판은 아니다. 그러나 인지자본주의론이 기존의 가치이론에 대한 비판, 특히 노동시간의 ‘측정 불가능성’을 주요 근거 중 하나로 해서 세워져있는 만큼, 이상의 비판이 인지자본주의론에 일정한 타격은 가하리라 본다.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가치이론적으로 좀 더 유의미한 방식으로 인지자본주의론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개입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끝)

[※ 추가(2014년 2월 12일): 원하는 분이 있어서… 전문링크]